오랑캐꽃이 핀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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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2/24
Pages/Weight/Size 128*188*30mm
ISBN 9791128891663
Categories 사회 정치 > 사회비평/비판
Description
1~9권은 화성외국인센터 한윤수 소장이 기록한 895편의 외국인 노동자 상담 사례이고 10권은 이에 대한 해설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 책은 그들을 제대로 알기 위한 리얼한 생활 현장 이야기이고 삶에 관한 생생하고 진실한 최초의 기록이다. 외국인 200만 시대! 한국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경제의 근간을 떠받치는 그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동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산업현장뿐만 아니라 농어업에서도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 없이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들 삶에 관한 기록이 우리에겐 없다.
Contents
한국인들의 하소연
진상은 왜 이렇게 똑같을까
다섯 번 가면 회사 바꿔 준다는 미신
싹싹한 공무원을 만난 태국인
제2의 퇴직금, 국민연금 떼어먹기
사모님의 깨끗한 일 처리
400만 원 못 받은 웬이 나타난 곳
근로자 주장 인정하시겠습니까?
불법 체류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어라
파주에서 네 시간 걸려 온 베트남인
리즈키의 출산

밥 I, 밥 먹을 돈도 없는 요드락
밥 II, 닷새 안에 돈 줄게
라찬과 프롬마의 손가락
타나팟의 사장님은 굿 코리안
띠우가 만난 보령의 똑 부러진 감독관
사하라 사막에 떨구어도 살 사람
외국인도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
떠난 버스 잡아타기
약자의 편을 들어라!
나는 돈 받아 내는 수금귀
나를 보고 고개를 싹 돌리는 위라이
결혼하든지 파혼하든지 마음대로
타마오의 고마운 형
은행 문턱 I, 통장 만들다
13만 원 때문에 허벌나게 욕 먹다
성추행자가 득시글거리는 회사
내가 낳은 캄보디아 산토와 산바니
위장 결혼의 종말
고용지원센터가 멀어서요
태국만큼 소통이 어려운 캄보디아
의료보험 없는데 돈 안 들이고 수술하기
퇴직금과 해고 수당 중 양자택일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초년병들
베트남 후안의 낙동강 오리알 탈출기
순수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여행 가이드를 흠모한 생다오 이야기
아, 순두부백반이여!
돈 받기 전엔 기숙사 열쇠 주지 않기
그림자 여인
미쳤냐? 발안 가면 공짜인데
외국인 노동자는 왜 직장을 바꿀까?
발품 팔면 100퍼센트 받는다
막걸리 마시면 말짱 도루묵
산재 보험,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
개를 싫어하는 목사 때문에
초짜 감독관이 무서운 이유
진정 취하서에 사인하고 말았다
알라에게 I, 크샤가 받을 돈 525만 원
말수 언니 그리워
카인, 7일 만에 이탈하다
8000원 때문에 울려 퍼진 바보들의 합창
새중간에 낀 나는 어떻게 해야겠니?
운전면허 지금 딸래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유팡코
날 보면 피하는 사우나의 사장님들
목사님 밀어붙여요
출국 직전 돈 받아 달라고 떼쓰는 민라쿤
가수 I, 무책임한 펑
가수 II, 네가 빌어!
무굴 제국 황제 경호원 같은 사자드
어디서든 독판으로 떠들기
센터 전통을 잇는 셍호르의 임신
가브리엘의 필리핀 셈법
구닥다리 사장님과 기안의 퇴직금
새내기 태국 여성들, 지금은 참신하다만
주말에도 밥을 주세요
심사가 고약한 사모님의 칼
출근 카드 찍지 마
퇴직금 준다는 공수표
순수 민간단체, 징하다
마지막 카드를 쓰다
알라에게 II, 아내까지 초청하려고
트렌드가 바뀌더라도 밀어붙이기
대통령도 안 돼
계속 미심쩍은 쿵
은행 문턱 II, 엄마 통장으로 돈 받은 베스나
나만큼 호흡 짧은 사람 있으면 손 들어
노예 계약 II, 송차이의 경우
맘대로 해, 내 돈 받는 거 아니니까
한국인 부장 보증 서 준 태국인들
중국 동포의 지갑을 주운 태국인
오디세우스여, 방랑을 끝낼 시간이다
란, 창밖의 여자
못 참아 I, 고물상으로 간 차이퐁
못 참아 II, 기숙사에서 짐 빼
수라간의 고무나무
4년 계약 돼요?
회사 절딴났잖아
태국에서 매일 밤 술 전화하는 파티난
태국인이 사인한 이유
친구의 죽음을 수습하는 휴엔
아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고
Author
한윤수
194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미복 입은 모습이 좋아 외교관을 꿈꿨지만 외교관 월급이 적어 품위 유지하려면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꿈을 접었다. 29살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판초 빌라』, 『본회퍼』, 『산체스네 아이들』, 『여공 20년 후』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다. 1978년 이오덕 선생이 농촌 아이들의 글을 모와 와 시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로 출판했다. 1980년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 와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10대 근로자들의 일기와 생활담』으로 출간했다. 계엄령하였지만 책 못 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려 2만 부를 찍어 200여 곳 교회 청년회를 통해 뿌렸다. 나오자마자 책은 판금됐고, 청년 사장 한윤수는 도망자가 됐다. 그해 가을 세상이 잠잠해지자 있는 돈 없는 돈 쓸어 모아 글 쓴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급하고 함께 마지막으로 북한산 등반을 했다.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1세기 초까지 대학 및 노동계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고, 원본을 구할 수 없어 복사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청년사’ 운영을 후배에게 넘기고 경기도 고양군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누가 치어(稚魚)도 대 주고, 크면 다 가져다 팔아 주겠다고 해서 가물치 양어장을 차렸지만 가물치의 생태에 대한 전문적 소양의 부족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빚이 늘어 갚을 요량으로 ‘형제출판사’를 열어 가족들 사이의 일을 적은 일기문들을 <고부일기 시리즈>로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무너진 가계는 도무지 회복이 안 됐고 1997년 IMF 사태로 결정타를 맞았다. 채무는 60억 원 가까이 늘어났다. 저당 잡혔던 친구들 집 12채도 다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가물치 양어장 터가 삼송택지개발지구에 수용돼 그 보상금으로 원금을 갚았다. 그러나 생활비는커녕 아이들 교통비도 갖다주지 못한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교회에 가서 같이 앉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부인과 “1. 절대로 죽지 않는다. 2. 희망을 가진다”고 합의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 안 가 본 곳 없이 도망다니다가 결국 부인에게 너무나 미안해 결혼하고도 25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 교회에 1998년 2월 어느 날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섰다. 교회에 간 동기가 일차적으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빚쟁이들을 피해 보자는 도피 심리가 더 컸다. 그나마 안전하겠지 했던 교회에까지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날 빚쟁이들이 교회로 와서 노래 부르고 있는 그에게 ‘넌 빚을 지고선 즐겁게 노래가 나오냐’고 했다. 빚쟁이들한테 몰려 마지막으로 간 데가 신학교다. 200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고 안산에 오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나 ‘안산노동자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음 봤다. 새카만 모습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10대 노동자들 생각이 났다. 30년 전 그 애들의 얼굴이 겹쳤다. 맨날 돈 떼이고 두들겨 맞는 것이 똑같았다. 그런데 상담이 맘대로 안 되었다. 어느 날은 상담실이 컴퓨터 교육실이 되어버렸다. 아스팔트에 비치파라솔을 놓고 상담을 했다. 컴퓨터도 전화도 없고 상담일지도 없었다. 내 식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2007년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아무 연고도 없이, 단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경기도 화성시로 향했다. 2007년 6월 5일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돈 잘 받아 주는 센터로 통했다. ‘인생은 60부터’, ‘다시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2008년 11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일명 ‘외국인 노동자 탐구생활’ 백서라고 할 수 있는 ‘오랑캐꽃’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로 있다.
194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미복 입은 모습이 좋아 외교관을 꿈꿨지만 외교관 월급이 적어 품위 유지하려면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꿈을 접었다. 29살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판초 빌라』, 『본회퍼』, 『산체스네 아이들』, 『여공 20년 후』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다. 1978년 이오덕 선생이 농촌 아이들의 글을 모와 와 시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로 출판했다. 1980년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 와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10대 근로자들의 일기와 생활담』으로 출간했다. 계엄령하였지만 책 못 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려 2만 부를 찍어 200여 곳 교회 청년회를 통해 뿌렸다. 나오자마자 책은 판금됐고, 청년 사장 한윤수는 도망자가 됐다. 그해 가을 세상이 잠잠해지자 있는 돈 없는 돈 쓸어 모아 글 쓴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급하고 함께 마지막으로 북한산 등반을 했다.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1세기 초까지 대학 및 노동계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고, 원본을 구할 수 없어 복사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청년사’ 운영을 후배에게 넘기고 경기도 고양군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누가 치어(稚魚)도 대 주고, 크면 다 가져다 팔아 주겠다고 해서 가물치 양어장을 차렸지만 가물치의 생태에 대한 전문적 소양의 부족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빚이 늘어 갚을 요량으로 ‘형제출판사’를 열어 가족들 사이의 일을 적은 일기문들을 <고부일기 시리즈>로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무너진 가계는 도무지 회복이 안 됐고 1997년 IMF 사태로 결정타를 맞았다. 채무는 60억 원 가까이 늘어났다. 저당 잡혔던 친구들 집 12채도 다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가물치 양어장 터가 삼송택지개발지구에 수용돼 그 보상금으로 원금을 갚았다. 그러나 생활비는커녕 아이들 교통비도 갖다주지 못한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교회에 가서 같이 앉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부인과 “1. 절대로 죽지 않는다. 2. 희망을 가진다”고 합의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 안 가 본 곳 없이 도망다니다가 결국 부인에게 너무나 미안해 결혼하고도 25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 교회에 1998년 2월 어느 날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섰다. 교회에 간 동기가 일차적으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빚쟁이들을 피해 보자는 도피 심리가 더 컸다. 그나마 안전하겠지 했던 교회에까지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날 빚쟁이들이 교회로 와서 노래 부르고 있는 그에게 ‘넌 빚을 지고선 즐겁게 노래가 나오냐’고 했다. 빚쟁이들한테 몰려 마지막으로 간 데가 신학교다. 200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고 안산에 오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나 ‘안산노동자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음 봤다. 새카만 모습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10대 노동자들 생각이 났다. 30년 전 그 애들의 얼굴이 겹쳤다. 맨날 돈 떼이고 두들겨 맞는 것이 똑같았다. 그런데 상담이 맘대로 안 되었다. 어느 날은 상담실이 컴퓨터 교육실이 되어버렸다. 아스팔트에 비치파라솔을 놓고 상담을 했다. 컴퓨터도 전화도 없고 상담일지도 없었다. 내 식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2007년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아무 연고도 없이, 단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경기도 화성시로 향했다. 2007년 6월 5일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돈 잘 받아 주는 센터로 통했다. ‘인생은 60부터’, ‘다시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2008년 11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일명 ‘외국인 노동자 탐구생활’ 백서라고 할 수 있는 ‘오랑캐꽃’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