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희가 명대 리학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지은 책이 바로 『명유학안』이다. 전체 유학의 역사에서 명대 리학이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그 명대 리학의 정통이 왕수인, 유종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그러한 명대 유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일은 유종주의 후계자인 자신이야말로 가장 적임자라는 자부심이 황종희로 하여금 이 책을 저술하게 하였다.
명대 리학의 역사를 정리한 책은 이전에도 있었는데, 주여등(周汝登)의 『성학종전(聖學宗傳)과 손기봉(孫奇逢)의 『리학종전(理學宗傳)』을 들 수 있다. 황종희는 이 두 책과는 달리 『명유학안』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각 학자의 종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요령 있게 비평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황종희의 자신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명유학안』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사’로 불리거나 ‘명대의 유학을 연구하기 위한 필독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이다.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 또는 이주(梨洲)이며,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 사람으로 동림파(東林派) 관료였던 황존소(黃尊素)의 아들이다. 청년 시절 동림의 후예이자 복사(復社)의 명사로서 활약하며 정치 운동에도 참가하였고, 청(淸)나라 군대가 남하하자 의용군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명조(明朝) 회복의 희망이 사라진 뒤에는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며 청조(淸朝)의 부름을 거절하고 명(明)의 유로(遺老)로서 일생을 마쳤다. 스승인 유종주(劉宗周)를 통해 양명학(陽明學)의 온건한 측면을 계승하고 관념적인 심학(心學)의 횡류(橫流)를 비판하였으며, 경세(經世)를 위한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제창하여 청대 고증학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저술로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유학안(明儒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등 다수가 있다.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이다.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 또는 이주(梨洲)이며,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 사람으로 동림파(東林派) 관료였던 황존소(黃尊素)의 아들이다. 청년 시절 동림의 후예이자 복사(復社)의 명사로서 활약하며 정치 운동에도 참가하였고, 청(淸)나라 군대가 남하하자 의용군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명조(明朝) 회복의 희망이 사라진 뒤에는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며 청조(淸朝)의 부름을 거절하고 명(明)의 유로(遺老)로서 일생을 마쳤다. 스승인 유종주(劉宗周)를 통해 양명학(陽明學)의 온건한 측면을 계승하고 관념적인 심학(心學)의 횡류(橫流)를 비판하였으며, 경세(經世)를 위한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제창하여 청대 고증학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저술로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유학안(明儒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