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물불·고루·동정, 독일명은 Kolu Li. 경남 의령 출신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일제강점 후 도만하여 환인현 동창학교와 무송현 백산학교 교사를 지내고 상하이 동제대학을 졸업했다. 1922년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지금의 훔볼트대학)에 입학해 1927년 「중국의 생사공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벨기에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영국·프랑스·미국·일본을 시찰한 뒤 귀국해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경에 붙잡혀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을 간행하고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조선건민회 대표로 참석, 평양에 잔류해 북한 국어학의 토대를 닦았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묘소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저서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독일어), 『한국, 그리고 일제에 맞선 독립투쟁』(독일어), 『고투사십년』, 『조선어음성학』, 『국어학논총』, 『조선어 조 연구』가 있다.
호는 물불·고루·동정, 독일명은 Kolu Li. 경남 의령 출신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일제강점 후 도만하여 환인현 동창학교와 무송현 백산학교 교사를 지내고 상하이 동제대학을 졸업했다. 1922년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지금의 훔볼트대학)에 입학해 1927년 「중국의 생사공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벨기에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영국·프랑스·미국·일본을 시찰한 뒤 귀국해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경에 붙잡혀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을 간행하고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조선건민회 대표로 참석, 평양에 잔류해 북한 국어학의 토대를 닦았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묘소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저서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독일어), 『한국, 그리고 일제에 맞선 독립투쟁』(독일어), 『고투사십년』, 『조선어음성학』, 『국어학논총』, 『조선어 조 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