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유교의 역사를 체계화시켜 하나의 정형화된 도식으로 만든 작품으로, 공자와 유교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유교의 창립, 공자와 유교의 관계, 유교와 제자백가의 투쟁, 유교의 전파와 사상 통일 등 유교의 성립과 전개에 관한 일련의 과정은 물론, 그 과정에서 상호 관계를 맺었던 제자백가의 양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당시에 활동했던 거의 모든 제자백가의 성립과 활동 등에 관한 핵심 원전 텍스트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상호 대립과 투쟁, 조화와 융합의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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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권?공자가 제도를 개혁하자 제자와 당시 사람들이 옛 제도에 근거하여 질문하다孔子改制弟子時人據舊制問難考
1. 공자가 제도를 개혁하자 제자들이 옛 제도에 근거하여 질문하다[孔子改制, 弟子據舊制問難]
2. 공자가 제도를 개혁하자 당시 사람들이 옛 제도에 근거하여 질문하다[孔子改制, 時人據舊制問難]
3. 제자들이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자 공자가 개혁한 제도로 바로잡아주다[弟子仍舊制, 孔子以所改之制定之]
4. 당시 사람들이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자 제자들이 공자가 개혁한 제도로 알려주다[時人仍舊制, 弟子以孔子所改之制告之]
5. 공자가 제도를 개혁한 후 제자들이 그것을 따르고 옛 제도를 버리다[孔子改制後, 弟子從之而舍舊制]
6. 공자가 제도를 개혁한 후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고 옛 제도를 버리다[孔子改制後, 時人從之而舍舊制]
7. 당시 사람들이 옛 제도에 의혹을 품자 후학들이 공자가 개혁한 제도로 그 의혹을 풀어주다[時人惑舊制, 後學以孔子所改之制闢之]
8.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제도를 별도로 만들자 후학들이 공자가 개혁한 제도로 절충하다[時人別創新制, 後學以孔子所改之制折之]
제15권?묵가와 노자의 유교 공격이 가장 극성하다墨?老攻儒尤盛考
1. 묵가 학파가 유교를 공격하다[墨學攻儒]
2. 노자 학파가 유교를 공격하다[老學攻儒]
제16권?유가와 묵가가 교설을 다투면서 서로 공격하다儒·墨爭敎交攻考
1. 유가와 묵가가 서로 공격하다[儒·墨互攻]
2. 유가가 묵가를 공격하다[儒攻墨]
3. 묵가가 유가를 공격하다[墨攻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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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캉유웨이,김동민
청나라 말기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로, 廣東省 南海 출신이다. 자신의 고향에 사숙 萬木草堂을 열어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변법유신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표출했고, 梁啓超와 陳千秋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후 北京과 上海에서 勉學會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公車上書’를 올려 변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1897년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워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로 개혁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98년에는 그의 ‘變法自彊策’이 光緖帝에게 수용되어 戊戌變法이라는 개혁을 직접 주도했다. 그러나 100일 남짓한 기간 만에 袁世凱의 배반과 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100일 變法’으로 끝나버렸고, 康有爲는 梁啓超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 保皇會를 조직하여 황제의 복위를 시도하거나 孔敎國敎化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 말기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로, 廣東省 南海 출신이다. 자신의 고향에 사숙 萬木草堂을 열어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변법유신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표출했고, 梁啓超와 陳千秋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후 北京과 上海에서 勉學會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公車上書’를 올려 변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1897년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워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로 개혁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98년에는 그의 ‘變法自彊策’이 光緖帝에게 수용되어 戊戌變法이라는 개혁을 직접 주도했다. 그러나 100일 남짓한 기간 만에 袁世凱의 배반과 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100일 變法’으로 끝나버렸고, 康有爲는 梁啓超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 保皇會를 조직하여 황제의 복위를 시도하거나 孔敎國敎化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