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은 최崔, 이름은 식寔,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25세 무렵 보조 지눌普照知訥을 찾아가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눌 입적 후에 수선사修禪社 2세 자리에 올랐다. 고종高宗의 명으로 단속사斷俗寺 주지를 보냈으나, 수선사를 본사本社로 하며 단속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법문을 행하였다. 본사에 있던 1233년에 병이 났고 이듬해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옮겨 가 있다가 세수 57세, 법랍 32세로 입적하였다. 고종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1235년 여름에 광원사廣原寺 북쪽에서 장사 지내고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최우崔瑀의 청을 받고 왕명에 의해 이규보李奎報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본서 이외에 『종경촬요宗鏡撮要』 중간重刊에 붙인 발문跋文,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합간한 책에 쓴 발문,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금강반야바라밀경찬 병서주金剛般若波羅蜜經讚幷序注」,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등의 저술이 현존한다.
속성은 최崔, 이름은 식寔,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25세 무렵 보조 지눌普照知訥을 찾아가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눌 입적 후에 수선사修禪社 2세 자리에 올랐다. 고종高宗의 명으로 단속사斷俗寺 주지를 보냈으나, 수선사를 본사本社로 하며 단속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법문을 행하였다. 본사에 있던 1233년에 병이 났고 이듬해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옮겨 가 있다가 세수 57세, 법랍 32세로 입적하였다. 고종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1235년 여름에 광원사廣原寺 북쪽에서 장사 지내고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최우崔瑀의 청을 받고 왕명에 의해 이규보李奎報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본서 이외에 『종경촬요宗鏡撮要』 중간重刊에 붙인 발문跋文,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합간한 책에 쓴 발문,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금강반야바라밀경찬 병서주金剛般若波羅蜜經讚幷序注」,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등의 저술이 현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