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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제본소] 사기열전 (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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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11/24
Pages/Weight/Size 150*217*80mm
ISBN 2512323999209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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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사기열전 (상) : 역대 주석본 비교 고증 완역판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도서] 사기열전 (하) : 역대 주석본 비교 고증 완역판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Contents
역자 서문

1_ 백이열전伯夷列傳
2_ 관안열전管晏列傳
3_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4_ 사마양저열전司馬穰?列傳
5_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6_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7_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8_ 상군열전商君列傳
9_ 소진열전蘇秦列傳
10_ 장의열전張儀列傳
11_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12_ 양후열전穰侯列傳
13_ 백기왕전열전白起王?列傳
14_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15_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6_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17_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18_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19_ 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
20_ 악의열전樂毅列傳
21_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22_ 전단열전田單列傳
23_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24_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25_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26_ 자객열전刺客列傳
27_ 이사열전李斯列傳
28_ 몽염열전蒙恬列傳
29_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30_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31_ 경포열전?布列傳
32_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33_ 한신노관열전韓信盧?列傳
34_ 전담열전田?列傳
35_ 번역등관열전樊??灌列傳

참고문헌
찾아보기

36_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37_ 역생육가열전?生陸賈列傳
38_ 부근괴성열전傅??成列傳
39_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40_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41_ 원앙조조열전袁?? 錯列傳
42_ 장석지풍당 열전張釋之馮唐列傳
43_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44_ 전숙열전田叔列傳
45_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46_ 오왕비열전吳王?列傳
47_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48_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49_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50_ 흉노열전匈奴列傳
51_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52_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53_ 남월열전南越列傳
54_ 동월열전東越列傳
55_ 조선열전朝鮮列傳
56_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57_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58_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59_ 순리열전循吏列傳
60_ 급정열전汲鄭列傳
61_ 유림열전儒林列傳
62_ 혹리열전酷吏列傳
63_ 대원열전大宛列傳
64_ 유협열전游俠列傳
65_ 영행열전?幸列傳
66_ 골계열전滑稽列傳
67_ 일자열전日者列傳
68_ 귀책열전龜策列傳
69_ 화식열전貨殖列傳
70_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부록: 보임안서報任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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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사마천,송도진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제례를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기원전 112년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 서남이(오늘날의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릉의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했다가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궁형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사마천의 죽음(기원전 91년 무렵)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제례를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기원전 112년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 서남이(오늘날의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릉의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했다가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궁형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사마천의 죽음(기원전 91년 무렵)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