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애명월도의 원작자인 '고룡'은 김용, 양우생과 함께 중국 무협 소설의 대표 3대 거장으로 꼽히며 본명은 웅요화(熊耀華)로, '고룡'은 그의 필명이다.
그의 본적지는 중국 장시성 난창이나, 출생지는 홍콩이고, 어릴 적에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에 살았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한 1950년부터 대만에 정착한 뒤, 1954년 고등학교 진학을 기점으로 시를 지어 정식 문단에 데뷔한다.
순문학을 꿈꿨던 소년은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돈을 벌기 위해 1955년에 ‘고룡’이라는 필명을 짓고 1958년부터 무협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초반에는 인기가 많지 않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인기를 서서히 얻으며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룡’이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58년에 첫 배우자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타계하기까지 28년 동안 두 번의 동거와 세 번의 결혼을 했다. 동거 생활의 생계를 위해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 1960년에 처녀작『창궁신검蒼穹神劍』을 출판했다. 고등학생이었던 1955년에 이미 순문학 작품인 단편소설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고룡이라는 필명으로 등단했었지만, 생계가 그를 무협소설 작가의 길로 이끈 것이다. 이후 십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1964년 『완화세검록浣花洗劍錄』을 발표하면서부터 자기만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6년의 『무림외사武林外史』와 『절대쌍교絶代雙驕』, 1967년의 『초류향전기楚留香傳奇』, 1968년의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劍』등으로 시작된 고룡의 전성기는 수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이 전성기가 절정에 도달한 것은 1976년 무렵이었다.
1976년에 홍콩의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고룡의 1971년 작 『유성流星.호접胡蝶.검劍』과 1974년 작 『천애天涯.명월明月.도刀』를 영화화하면서부터 이른바 고룡의 영화 시대가 화려하게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절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77년 간염 증세가 나타난 이후 고룡의 건강은 점차 나빠져 갔고, 그에 따라 작품 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985년에 간경화로 인한 식도류출혈로 타계했다. 향년 48세. 그의 작풍은 서양문학과 전통문학의 문체가 혼재된 기존 무협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 김용도 “고룡이야말로 협객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고룡은 칠십여 편이 넘는 장편 무협소설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다정검객무정검』은 그중 대표작이며, 『절대쌍교』 『초류향전기』등이 한국의 무협 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고룡’의 무협은 기존 무협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와 시각적 묘사가 특징으로 기존의 중국 무협들과는 다른 독특한 색깔이 있었고 추리무협이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가이다.
‘김용’ 또한 “고룡이 바로 협객에 어울리는 이”라며 ‘고룡’의 무협 세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흔히 무협 문학이 거론되면 ‘김용’과 ‘고룡’이 쌍벽을 이루는 대가들로 거론되는데 ‘고룡’과 ‘김용’의 작품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과의 인물 관계를 보면, ‘김용’의 작품에서 주인공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대부분 연인이지만, ‘고룡’ 작품에서 주인공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항상 동성의 친구라는 부분이다. 싸움 장면의 표현 또한 다른데, ‘고룡’은 싸움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기 보다는 그 싸움이 벌어지기까지의 준비과정과 심리 상태에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싸움 직전까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고룡’은 고수들의 싸움이 무공의 높고 낮음보다는 마음의 올바름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고 ‘고룡’의 작품에서는 어느 쪽이든 옳은 일을 한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이기게 되니, 어차피 한 순간에 결정 나는 승부를 굳이 상세하게 초식을 나열하며 싸움을 묘사하지 않고 그 순간의 긴장감을 더욱 살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렇다 할 무공이 없는 것도 ‘고룡’식 무협의 특징인데, 대부분의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안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천애명월도’의 주인공 부홍설 역시 ‘사부나 문파없이 스스로 창안’한 도법을 사용한다고 명확히 알려져 있는데, 그는 천하제일의 쾌도를 익히기 위해 하루에도 몇 시간씩 도를 뽑는 연습을 하고, 밤눈을 밝히기 위해 어둠 속에 향을 켜놓고 지켜보는 수련을 한다. ‘고룡’의 작품에 나오는 고수들은 대부분 스스로의 노력으로 현재의 위치를 얻는다.
‘고룡’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추리와 반전’인데, 소설을 많이 읽으면 대강 누가 배신할 것인지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어떤 작품은 그보다 더 나아가 반전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단편의 경우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놓을 수 없어서 짐작하기 쉽다.
‘고룡’은 또한 문학적인 학식과 깊이가 깊고 도전을 하던 작가 중 하나였는데, ‘천애명월도’의 경우 ‘고룡’이 처음으로 산문 문체를 적용한 시적인 무협을 시도한 작품이었다. 예를 들면, ‘천애명월도’에서 “석양이 서쪽으로 기운다. 부홍설은 석양 아래 서 있었다. 석양 아래에는 그 혼자였다.” 라는 반복되는 문장이나, “창백한 손, 칠흑같은 흑도, 선홍빛 검, 창백한 손” 등 대비를 이루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보이게 되는데, 이런 방식은 그의 후기작에도 종종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절대쌍교’와 ‘다정검객무정검’, ‘비도우견비도’를 비롯하여, ‘초류향’ 시리즈, ‘소리비도’ 시리즈, ‘육소봉’ 시리즈 등 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 외에도 ‘불시집’이라는 수필집을 비롯하여 ‘도혼’, ‘소림천하’, ‘비취호리’, ‘정인간도’ 등 영화 시나리오, 본인 소설의 드라마화나 영화화 각본을 쓰는 등 다방면에서 무협 문학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의 작품들 중 인기가 많았던 ‘절대쌍교’, ‘초류향’ 시리즈, ‘소리비도’ 시리즈, ‘육소봉’ 시리즈를 비롯하여 ‘다정검객무정검’, ‘비도우견비도’ 등은 그의 대표작품들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뮤지컬, 드라마, 만화, 영화, 게임 등으로 재탄생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중국 대중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천애명월도의 원작자인 '고룡'은 김용, 양우생과 함께 중국 무협 소설의 대표 3대 거장으로 꼽히며 본명은 웅요화(熊耀華)로, '고룡'은 그의 필명이다.
그의 본적지는 중국 장시성 난창이나, 출생지는 홍콩이고, 어릴 적에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에 살았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한 1950년부터 대만에 정착한 뒤, 1954년 고등학교 진학을 기점으로 시를 지어 정식 문단에 데뷔한다.
순문학을 꿈꿨던 소년은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돈을 벌기 위해 1955년에 ‘고룡’이라는 필명을 짓고 1958년부터 무협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초반에는 인기가 많지 않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인기를 서서히 얻으며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룡’이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58년에 첫 배우자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타계하기까지 28년 동안 두 번의 동거와 세 번의 결혼을 했다. 동거 생활의 생계를 위해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 1960년에 처녀작『창궁신검蒼穹神劍』을 출판했다. 고등학생이었던 1955년에 이미 순문학 작품인 단편소설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고룡이라는 필명으로 등단했었지만, 생계가 그를 무협소설 작가의 길로 이끈 것이다. 이후 십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1964년 『완화세검록浣花洗劍錄』을 발표하면서부터 자기만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6년의 『무림외사武林外史』와 『절대쌍교絶代雙驕』, 1967년의 『초류향전기楚留香傳奇』, 1968년의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劍』등으로 시작된 고룡의 전성기는 수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이 전성기가 절정에 도달한 것은 1976년 무렵이었다.
1976년에 홍콩의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고룡의 1971년 작 『유성流星.호접胡蝶.검劍』과 1974년 작 『천애天涯.명월明月.도刀』를 영화화하면서부터 이른바 고룡의 영화 시대가 화려하게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절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77년 간염 증세가 나타난 이후 고룡의 건강은 점차 나빠져 갔고, 그에 따라 작품 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985년에 간경화로 인한 식도류출혈로 타계했다. 향년 48세. 그의 작풍은 서양문학과 전통문학의 문체가 혼재된 기존 무협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 김용도 “고룡이야말로 협객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고룡은 칠십여 편이 넘는 장편 무협소설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다정검객무정검』은 그중 대표작이며, 『절대쌍교』 『초류향전기』등이 한국의 무협 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고룡’의 무협은 기존 무협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와 시각적 묘사가 특징으로 기존의 중국 무협들과는 다른 독특한 색깔이 있었고 추리무협이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가이다.
‘김용’ 또한 “고룡이 바로 협객에 어울리는 이”라며 ‘고룡’의 무협 세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흔히 무협 문학이 거론되면 ‘김용’과 ‘고룡’이 쌍벽을 이루는 대가들로 거론되는데 ‘고룡’과 ‘김용’의 작품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과의 인물 관계를 보면, ‘김용’의 작품에서 주인공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대부분 연인이지만, ‘고룡’ 작품에서 주인공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항상 동성의 친구라는 부분이다. 싸움 장면의 표현 또한 다른데, ‘고룡’은 싸움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기 보다는 그 싸움이 벌어지기까지의 준비과정과 심리 상태에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싸움 직전까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고룡’은 고수들의 싸움이 무공의 높고 낮음보다는 마음의 올바름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고 ‘고룡’의 작품에서는 어느 쪽이든 옳은 일을 한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이기게 되니, 어차피 한 순간에 결정 나는 승부를 굳이 상세하게 초식을 나열하며 싸움을 묘사하지 않고 그 순간의 긴장감을 더욱 살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렇다 할 무공이 없는 것도 ‘고룡’식 무협의 특징인데, 대부분의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안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천애명월도’의 주인공 부홍설 역시 ‘사부나 문파없이 스스로 창안’한 도법을 사용한다고 명확히 알려져 있는데, 그는 천하제일의 쾌도를 익히기 위해 하루에도 몇 시간씩 도를 뽑는 연습을 하고, 밤눈을 밝히기 위해 어둠 속에 향을 켜놓고 지켜보는 수련을 한다. ‘고룡’의 작품에 나오는 고수들은 대부분 스스로의 노력으로 현재의 위치를 얻는다.
‘고룡’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추리와 반전’인데, 소설을 많이 읽으면 대강 누가 배신할 것인지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어떤 작품은 그보다 더 나아가 반전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단편의 경우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놓을 수 없어서 짐작하기 쉽다.
‘고룡’은 또한 문학적인 학식과 깊이가 깊고 도전을 하던 작가 중 하나였는데, ‘천애명월도’의 경우 ‘고룡’이 처음으로 산문 문체를 적용한 시적인 무협을 시도한 작품이었다. 예를 들면, ‘천애명월도’에서 “석양이 서쪽으로 기운다. 부홍설은 석양 아래 서 있었다. 석양 아래에는 그 혼자였다.” 라는 반복되는 문장이나, “창백한 손, 칠흑같은 흑도, 선홍빛 검, 창백한 손” 등 대비를 이루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보이게 되는데, 이런 방식은 그의 후기작에도 종종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절대쌍교’와 ‘다정검객무정검’, ‘비도우견비도’를 비롯하여, ‘초류향’ 시리즈, ‘소리비도’ 시리즈, ‘육소봉’ 시리즈 등 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 외에도 ‘불시집’이라는 수필집을 비롯하여 ‘도혼’, ‘소림천하’, ‘비취호리’, ‘정인간도’ 등 영화 시나리오, 본인 소설의 드라마화나 영화화 각본을 쓰는 등 다방면에서 무협 문학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의 작품들 중 인기가 많았던 ‘절대쌍교’, ‘초류향’ 시리즈, ‘소리비도’ 시리즈, ‘육소봉’ 시리즈를 비롯하여 ‘다정검객무정검’, ‘비도우견비도’ 등은 그의 대표작품들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뮤지컬, 드라마, 만화, 영화, 게임 등으로 재탄생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중국 대중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