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꽃이 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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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2/24
Pages/Weight/Size 128*188*30mm
ISBN 9791128891632
Categories 사회 정치 > 사회비평/비판
Description
1~9권은 화성외국인센터 한윤수 소장이 기록한 895편의 외국인 노동자 상담 사례이고 10권은 이에 대한 해설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 책은 그들을 제대로 알기 위한 리얼한 생활 현장 이야기이고 삶에 관한 생생하고 진실한 최초의 기록이다. 외국인 200만 시대! 한국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경제의 근간을 떠받치는 그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동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산업현장뿐만 아니라 농어업에서도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 없이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들 삶에 관한 기록이 우리에겐 없다.
Contents
얼음공주의 급여 명세서
꽃남은 왜 죄다 시시하게 사라질까
농부의 마음을 배신한 한과 한
‘잔인한’ 4월, 노동부 출석 조사 기록들
또 때리기만 해 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떠돌이별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의 방법
친구의 친구면 친구다
외국인을 돕는 쉬운 방법 II, 쉼터 운영
한국 사모님의 압도적 공포
센터의 보물 2호
센터 에이스 N 여사의 아킬레스건
막대기로 옆구리를 찔린 누남
화교 청년 타와차이의 좌절
저 먹을 건 알아보는 메기의 눈

눈물 한번 잘 흘린 덕으로 게임 끝
원숭이가 사자 되어 고기 먹는다
바퀴 없는 오토바이로 ‘죽난’? ‘사난’?
필리핀에서 온 조세핀의 편지
고용지원센터에 근본 대책을 건의하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보내고 싶은 빈대
태국인들에게 2년간 구애
체불 임금 해결하는 시스템은 작동하는가?
결국 주홍 글씨를 지웠다
위짓의 아내 공포증
횡령 I,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해야 할 일
촛불 춤,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짜 우정
돈을 받기 위한 세 고개
해결사 I, 보호자가 맞짱 뜬다
해결사 II, 재판까지 간다
나롱, 이게 웃는 모습이지롱
컨테이너 기숙사비
한심한 뒷북
포기를 모르는 불도그 센터
그들과 동행해 주는 것이 희망이다
브로커, 양의 탈을 쓴 늑대
횡령 II. 국민연금
백설공주 란의 이중고
고물상은 싫어요
티라왓의 진실 게임
별게 다 개인 정보 유출
로랜드의 혼자 전화 걸기
도움에도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외국인 노동자를 짐짝 취급
폭우를 뚫고 올라온 캄보디아 네 명
말썽쟁이 데니스
노동부에 통역이 없다
먼지 속의 캄보디아인
강가에 내놓은 파이야
람야이는 왜 한국을 떠날까?
담배 한 개비로 시작된 파용의 방황
봉사자들이 외국에 많이 나가는 이유
철학자가 된 자원봉사자
마랑의 산재 보험 카드
남편 회사 근처로 옮기고 싶은 카피
필리핀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
누가 뭐래도 당당한 길
친구 따라 강남 가는 태국인
교회가 할 일은 어디까지인가
Author
한윤수
194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미복 입은 모습이 좋아 외교관을 꿈꿨지만 외교관 월급이 적어 품위 유지하려면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꿈을 접었다. 29살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판초 빌라』, 『본회퍼』, 『산체스네 아이들』, 『여공 20년 후』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다. 1978년 이오덕 선생이 농촌 아이들의 글을 모와 와 시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로 출판했다. 1980년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 와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10대 근로자들의 일기와 생활담』으로 출간했다. 계엄령하였지만 책 못 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려 2만 부를 찍어 200여 곳 교회 청년회를 통해 뿌렸다. 나오자마자 책은 판금됐고, 청년 사장 한윤수는 도망자가 됐다. 그해 가을 세상이 잠잠해지자 있는 돈 없는 돈 쓸어 모아 글 쓴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급하고 함께 마지막으로 북한산 등반을 했다.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1세기 초까지 대학 및 노동계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고, 원본을 구할 수 없어 복사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청년사’ 운영을 후배에게 넘기고 경기도 고양군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누가 치어(稚魚)도 대 주고, 크면 다 가져다 팔아 주겠다고 해서 가물치 양어장을 차렸지만 가물치의 생태에 대한 전문적 소양의 부족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빚이 늘어 갚을 요량으로 ‘형제출판사’를 열어 가족들 사이의 일을 적은 일기문들을 <고부일기 시리즈>로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무너진 가계는 도무지 회복이 안 됐고 1997년 IMF 사태로 결정타를 맞았다. 채무는 60억 원 가까이 늘어났다. 저당 잡혔던 친구들 집 12채도 다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가물치 양어장 터가 삼송택지개발지구에 수용돼 그 보상금으로 원금을 갚았다. 그러나 생활비는커녕 아이들 교통비도 갖다주지 못한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교회에 가서 같이 앉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부인과 “1. 절대로 죽지 않는다. 2. 희망을 가진다”고 합의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 안 가 본 곳 없이 도망다니다가 결국 부인에게 너무나 미안해 결혼하고도 25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 교회에 1998년 2월 어느 날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섰다. 교회에 간 동기가 일차적으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빚쟁이들을 피해 보자는 도피 심리가 더 컸다. 그나마 안전하겠지 했던 교회에까지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날 빚쟁이들이 교회로 와서 노래 부르고 있는 그에게 ‘넌 빚을 지고선 즐겁게 노래가 나오냐’고 했다. 빚쟁이들한테 몰려 마지막으로 간 데가 신학교다. 200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고 안산에 오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나 ‘안산노동자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음 봤다. 새카만 모습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10대 노동자들 생각이 났다. 30년 전 그 애들의 얼굴이 겹쳤다. 맨날 돈 떼이고 두들겨 맞는 것이 똑같았다. 그런데 상담이 맘대로 안 되었다. 어느 날은 상담실이 컴퓨터 교육실이 되어버렸다. 아스팔트에 비치파라솔을 놓고 상담을 했다. 컴퓨터도 전화도 없고 상담일지도 없었다. 내 식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2007년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아무 연고도 없이, 단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경기도 화성시로 향했다. 2007년 6월 5일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돈 잘 받아 주는 센터로 통했다. ‘인생은 60부터’, ‘다시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2008년 11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일명 ‘외국인 노동자 탐구생활’ 백서라고 할 수 있는 ‘오랑캐꽃’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로 있다.
194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미복 입은 모습이 좋아 외교관을 꿈꿨지만 외교관 월급이 적어 품위 유지하려면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꿈을 접었다. 29살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판초 빌라』, 『본회퍼』, 『산체스네 아이들』, 『여공 20년 후』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다. 1978년 이오덕 선생이 농촌 아이들의 글을 모와 와 시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로 출판했다. 1980년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 와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10대 근로자들의 일기와 생활담』으로 출간했다. 계엄령하였지만 책 못 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려 2만 부를 찍어 200여 곳 교회 청년회를 통해 뿌렸다. 나오자마자 책은 판금됐고, 청년 사장 한윤수는 도망자가 됐다. 그해 가을 세상이 잠잠해지자 있는 돈 없는 돈 쓸어 모아 글 쓴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급하고 함께 마지막으로 북한산 등반을 했다.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1세기 초까지 대학 및 노동계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고, 원본을 구할 수 없어 복사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청년사’ 운영을 후배에게 넘기고 경기도 고양군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누가 치어(稚魚)도 대 주고, 크면 다 가져다 팔아 주겠다고 해서 가물치 양어장을 차렸지만 가물치의 생태에 대한 전문적 소양의 부족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빚이 늘어 갚을 요량으로 ‘형제출판사’를 열어 가족들 사이의 일을 적은 일기문들을 <고부일기 시리즈>로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무너진 가계는 도무지 회복이 안 됐고 1997년 IMF 사태로 결정타를 맞았다. 채무는 60억 원 가까이 늘어났다. 저당 잡혔던 친구들 집 12채도 다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가물치 양어장 터가 삼송택지개발지구에 수용돼 그 보상금으로 원금을 갚았다. 그러나 생활비는커녕 아이들 교통비도 갖다주지 못한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교회에 가서 같이 앉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부인과 “1. 절대로 죽지 않는다. 2. 희망을 가진다”고 합의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 안 가 본 곳 없이 도망다니다가 결국 부인에게 너무나 미안해 결혼하고도 25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 교회에 1998년 2월 어느 날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섰다. 교회에 간 동기가 일차적으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빚쟁이들을 피해 보자는 도피 심리가 더 컸다. 그나마 안전하겠지 했던 교회에까지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날 빚쟁이들이 교회로 와서 노래 부르고 있는 그에게 ‘넌 빚을 지고선 즐겁게 노래가 나오냐’고 했다. 빚쟁이들한테 몰려 마지막으로 간 데가 신학교다. 200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고 안산에 오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나 ‘안산노동자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음 봤다. 새카만 모습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10대 노동자들 생각이 났다. 30년 전 그 애들의 얼굴이 겹쳤다. 맨날 돈 떼이고 두들겨 맞는 것이 똑같았다. 그런데 상담이 맘대로 안 되었다. 어느 날은 상담실이 컴퓨터 교육실이 되어버렸다. 아스팔트에 비치파라솔을 놓고 상담을 했다. 컴퓨터도 전화도 없고 상담일지도 없었다. 내 식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2007년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아무 연고도 없이, 단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경기도 화성시로 향했다. 2007년 6월 5일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돈 잘 받아 주는 센터로 통했다. ‘인생은 60부터’, ‘다시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2008년 11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일명 ‘외국인 노동자 탐구생활’ 백서라고 할 수 있는 ‘오랑캐꽃’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