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유교의 역사를 체계화시켜 하나의 정형화된 도식으로 만든 작품으로, 공자와 유교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유교의 창립, 공자와 유교의 관계, 유교와 제자백가의 투쟁, 유교의 전파와 사상 통일 등 유교의 성립과 전개에 관한 일련의 과정은 물론, 그 과정에서 상호 관계를 맺었던 제자백가의 양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당시에 활동했던 거의 모든 제자백가의 성립과 활동 등에 관한 핵심 원전 텍스트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상호 대립과 투쟁, 조화와 융합의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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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제자백가가 교설을 다투고 서로 공격하다諸子爭敎互攻考
1. 제자백가의 상호 공격에 대한 종합적 의미[諸子互攻總義]
2. 묵가가 제자백가를 공격하다[墨攻諸子]
3. 묵가가 양주를 공격하다[墨攻楊朱]
4. 묵가가 오려를 공격하다[墨攻吳慮]
5. 노자가 유가 및 묵가를 공격하다[老攻儒?墨]
6. 노자가 묵가 학파를 공격하다[老攻墨學]
7. 노자가 명가를 공격하다[老攻名家]
8. 노자가 법술가를 공격하다[老攻法術家]
9. 노자가 형명가?법술가?종횡가를 공격하다[老攻刑名?法術?縱橫家]
10. 노자가 제자백가를 공격하다[老攻諸子]
11. 유가 및 도가가 법술가를 공격하다[儒?道攻法術家]
12. 유가 및 도가가 제자백가를 공격하다[儒?道攻諸子]
13. 명가와 법가가 서로 공격하다[名?法家交攻]
14. 명가가 종횡가를 공격하다[名家攻縱橫家]
15. 법가가 양주 학파를 공격하다[法家攻楊學]
제7권?유교는 공자가 창립한 것이다儒敎爲孔子所創考
1. 공자가 유교를 창립했다는 명확한 증거[孔子創儒顯證]
2. 공자가 유교 창립의 대의를 스스로 밝히다[孔子自明創儒大義]
3. 공자의 제자와 후학이 유교 창립의 대의를 드러내 밝히다[孔子弟子後學發明創儒大義]
4. 이교(異敎)의 유교 비판에서 공자를 핵심 공격한 것은 유교가 공자에 의해 특별히 창립된 것을 안 것이다[異敎非儒專攻孔子, 知儒爲孔子所特創]
5. 공자가 유교를 창립 후 그 복장을 유복(儒服)이라고 하다[孔子創儒後, 其服謂之儒服]
6. 공자가 유교를 창립한 후 그 책을 유서(儒書)라고 하다[孔子創儒後, 其書謂之儒書]
7. 공자가 유교를 창립한 후 제자들이 전한 공자의 말씀을 유설(儒說)이라고 하다[孔子創儒後, 諸弟子傳其口說謂之儒說]
8. 공자가 유교를 창립한 후 그 교설을 따른 제자들을 유생(儒生)이라고 하다[孔子創儒後, 諸弟子從其敎者謂之儒生]
제8권?공자는 법도를 제정한 왕이다孔子爲制法之王考
1. 공자는 법도를 제정한 왕이라는 명확한 증거[孔子爲制法之王顯證]
2. 공자는 신왕이다[孔子爲新王]
3. 공자는 소왕이다[孔子爲素王]
4. 공자는 문왕이다[孔子爲文王]
5. 공자는 성왕이다[孔子爲聖王]
6. 공자는 선왕이다[孔子爲先王]
7. 공자는 후왕이다[孔子爲後王]
8. 공자는 왕자이다[孔子爲王者]
9. 공자가 노나라에 왕을 가탁하다[孔子託王于魯]
10. 공자는 법도를 제정한 왕이라는 것에 대한 종합적 의미[孔子爲制法之王總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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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캉유웨이,김동민
청나라 말기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로, 廣東省 南海 출신이다. 자신의 고향에 사숙 萬木草堂을 열어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변법유신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표출했고, 梁啓超와 陳千秋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후 北京과 上海에서 勉學會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公車上書’를 올려 변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1897년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워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로 개혁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98년에는 그의 ‘變法自彊策’이 光緖帝에게 수용되어 戊戌變法이라는 개혁을 직접 주도했다. 그러나 100일 남짓한 기간 만에 袁世凱의 배반과 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100일 變法’으로 끝나버렸고, 康有爲는 梁啓超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 保皇會를 조직하여 황제의 복위를 시도하거나 孔敎國敎化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 말기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로, 廣東省 南海 출신이다. 자신의 고향에 사숙 萬木草堂을 열어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변법유신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표출했고, 梁啓超와 陳千秋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후 北京과 上海에서 勉學會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公車上書’를 올려 변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1897년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워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로 개혁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98년에는 그의 ‘變法自彊策’이 光緖帝에게 수용되어 戊戌變法이라는 개혁을 직접 주도했다. 그러나 100일 남짓한 기간 만에 袁世凱의 배반과 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100일 變法’으로 끝나버렸고, 康有爲는 梁啓超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 保皇會를 조직하여 황제의 복위를 시도하거나 孔敎國敎化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