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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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6/06/09
Pages/Weight/Size 153*224*35mm
ISBN 9788949714370
Categories 인문 > 서양철학
Description
현대 군사학 경영학 불후의 전략서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클라우제비츠『전쟁론(Vom Kriege, 1832~34)』 독일어 원전을 허문순 선생이 30여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한국 최초 완역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전쟁 때 황태자 아우구스트의 부관으로서 출정했는데, 1806년 예나전투에서 패배해 황태자와 함께 프랑스군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에 억류됐던 1년간 그는 프리드리히대왕 영광과 전통으로 빛나는 프로이센군이 어째서 뿌리도 없는 오합지졸 나폴레옹군대에게 어이없이 패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것이 바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을 집필한 동기이다. 1818년 베를린 사관학교장이 된 클라우제비츠는 12년간 전쟁론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프리드리히대왕과 나폴레옹 전쟁사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란 상대를 굴복시켜 자신의 의지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폭력행위라는 결론을 얻고 이를 정의로 삼았다. 전쟁에서 그 철저함을 결정짓는 것은 정치적 의도나 판단이라 여기고, ‘전쟁이란 다른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연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한 프리드리히대왕과 나폴레옹의 장수로서 탁월한 정치·군사적 전략의 재능을 바탕으로, 장수의 자질과 능력이 전쟁의 결과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그때까지 군사과학에서 개념이 막연했던 전략과 전술을 엄격히 구분해, ‘전쟁준비’로서 현대의 병참을 들어, 군사학과 용병술의 체계를 세웠다. 오늘날에는 이 전략, 전술, 병참을 통틀어서 용병술로 보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가 일정한 규칙과 이론을 세우고 그것을 전쟁사의 사례에 적용해 검증하는 연역·귀납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에 관해서 “이론은 교의가 아니라 관찰이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전쟁론』은 클라우제비츠가 1831년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 마리가 1832~34년까지 3년간 걸쳐 남편의 원고들을 편집, 출간한 책으로, 오늘날까지도 군사학·경영학 불후의 전략서로 손꼽히고 있다.
Contents
전쟁론Ⅰ

머리글 … 11
방침 … 18
머리말 … 22

제1편 전쟁의 본질에 대하여
제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 33
제2장 전쟁의 목적과 수단 … 59
제3장 군사적 천재 … 77
제4장 전쟁에서의 위험에 대하여 … 102
제5장 전쟁에서의 육체적 고통에 대하여 … 105
제6장 전쟁에 있어서의 정보 … 107
제7장 전쟁에서의 마찰 … 110
제8장 제1편의 결론 … 114

제2편 전쟁의 이론에 대하여
제1장 전쟁술의 구분 … 119
제2장 전쟁 이론에 대하여 … 129
제3장 전쟁술인가 전쟁학인가 … 151
제4장 방법주의 … 155
제5장 비판 … 163
제6장 전쟁 사례에 대하여 … 189

제3편 전략 일반에 대하여
제1장 전략 … 201
제2장 전략의 여러 요소 … 212
제3장 정신적 요소 … 214
제4장 중요한 정신력 … 217
제5장 군대의 무덕 … 219
제6장 용감성 … 225
제7장 불굴 … 230
제8장 수의 우세 … 232
제9장 기습 … 240
제10장 궤책 … 247
제11장 공간에서의 병력 집중 … 250
제12장 시간상 병력 집합 … 251
제13장 전략적 예비 병력 … 259
제14장 병력의 경제적 사용 … 263
제15장 기하학적 요소 … 265
제16장 군사적 행동 정지에 대해서 … 267
제17장 근대전 성격에 대하여 … 273
제18장 긴장과 휴식 … 275

제4편 전투
제1장 개관 … 281
제2장 근대 회전의 성격 … 282
제3장 전투 일반에 대하여 … 284
제4장 전투 일반에 대하여(이어서) … 289
제5장 전투 의의에 대해서 … 298
제6장 전투의 지속 시간 … 301
제7장 전투에서의 승패 결정 … 303
제8장 전투에 대한 양군의 합의 … 312
제9장 주력 전투 … 316
제10장 주력 전투(이어서 1) … 323
제11장 주력 전투(이어서 2) … 330
제12장 전승을 이용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 … 338
제13장 패전 뒤의 퇴각 … 352
제14장 야간 전투 … 356

제5편 전투력
제1장 개관 … 365
제2장 전장 군 전역 … 366
제3장 적군과 아군의 병력 비율 … 369
제4장 병종의 비율 … 373
제5장 군의 전투 서열 … 385
제6장 군의 일반적 배치 … 393
제7장 전위와 전초 … 401
제8장 선진 부대의 조치 … 411
제9장 야영 … 417
제10장 행군 … 420
제11장 행군(이어서 1) … 429
제12장 행군(이어서 2) … 434
제13장 사영 … 439
제14장 보급 … 446
제15장 후방 기지 … 465
제16장 병참선(兵站線) … 471
제17장 토지와 지형 … 476
제18장 제고(制高) … 481


전쟁론Ⅱ

제6편 방어
제1장 공격과 방어 … 489
제2장 전술에서의 공격과 방어의 관계 … 494
제3장 전술에서의 공격과 방어의 관계 … 498
제4장 공격의 구심성과 방어의 이심성 … 504
제5장 전략적 방어의 성격 … 509
제6장 방어 수단의 규모 … 512
제7장 공격과 방어의 서로 작용 … 520
제8장 여러 저항 방식 … 523
제9장 방어적 회전 … 542
제10장 요새 … 548
제11장 요새(이어서) … 560
제12장 방어 진지 … 567
제13장 견진지(堅陣地)와 보루 진지 … 574
제14장 측면 진지 … 584
제15장 산지 방어 … 588
제16장 산지 방어(이어서 1) … 598
제17장 산지 방어(이어서 2) … 609
제18장 하천 방어 … 615
제19장 하천 방어(이어서) … 634
제20장 소택지 방어와 범람 … 637
제21장 삼림 방어 … 645
제22장 초병선 방식 … 647
제23장 국토의 요충지 … 652
제24장 전략적 측면에 대한 활동 … 658
제25장 자기 국토 내부로의 후퇴 … 673
제26장 국민 총무장 … 690
제27장 전쟁터의 방어 … 698
제28장 전쟁터의 방어(이어서 1) … 703
제29장 전쟁터의 방어(이어서 2) … 722
제30장 전쟁터의 방어(이어서 3) … 726

제7편 공격(초안)
제1장 방어와 대립 관계에서 본 공격 … 763
제2장 전략적 공격의 성질 … 765
제3장 전략적 공격의 대상에 대하여 … 769
제4장 공격자측의 공격력 감퇴 … 770
제5장 전략적 공격의 극한점 … 772
제6장 적 전투력의 격멸 … 774
제7장 공세 회전 … 776
제8장 도하 … 778
제9장 방어 진지의 공격 … 782
제10장 보루 야영의 공격 … 784
제11장 산지 공격 … 786
제12장 초병선식 방어선의 공격 … 790
제13장 기동 … 792
제14장 소택지, 범람지, 삼림지의 공격 … 796
제15장 서로 결전을 요구하는 싸움터 공격 … 798
제16장 서로 결전을 원하지 않는 싸움터 공격 … 803
제17장 요새의 공격 … 808
제18장 수송대에 대한 공격 … 815
제19장 사영에 든 적군에 대한 공격 … 819
제20장 견제 … 827
제21장 침략 … 832

제8편 전쟁 계획
제1장 머리말 … 847
제2장 절대적 전쟁과 실제의 전쟁 … 850
제3장 전쟁 내적 연관과 노력의 크고작음 … 855
제4장 전쟁 목표에 관한 한층 자세한 규정 … 875
제5장 전쟁 목표에 관한 한층 자세한 규정(이어서) … 885
제6장 전쟁에서 정치적 목적 그 영향과 정치의 도구 … 888
제7장 제한된 전쟁 목표―\공격적 전쟁 … 900
제8장 제한된 전쟁 목표(이어서)―\방어 … 904
제9장 적의 완전한 타도를 목표로 할 때 전쟁 계획 … 911

클라우제비츠 생애와 작품과 그 영향 … 949
클라우제비츠 연보 … 974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 연보 … 980
Author
클라우제비츠,허문순
1780년 6월 1일 프로이센의 작은 도시 부르크에서 중산층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12살의 나이에 소년병으로 입대한 그는 프랑스혁명 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벌인 싸움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했으며 1831년 11월 16일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군에서 보낸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1803년 베를린 정규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당시 프로이센군 개혁의 기수였던 사관학교 교장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중령의 총애를 받았으며 졸업 후 장교 생활 중에도 줄곧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클라우제비츠에게 샤른호르스트는 그의 말대로 “정신적인 아버지이자 친구”였다.
임관하자마자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천거로 프로이센의 젊은 황태자 아우구스트(August)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그는 궁중 출입을 자주 하면서 여왕의 시녀였던 마리 폰 브륄(Marie von Bruhl)을 만나 결혼했다.
1806년 나폴레옹군과 맞서 싸운 아우에르슈테트(Auerstadt) 전투에서 그는 황태자 아우구스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혀 1년 동안 파리에 억류되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뒤 그는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핵심 참모로 기용되었으며 프로이센군의 개혁과 개편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일련의 개혁 논쟁에서 인력 정책과 군기 및 훈련 제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당시 군내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그 바람에 과격주의자라는 평판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는 무엇보다도 프로이센 정부의 프랑스에 대한 굴욕적인 종속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 지원을 요구해 왔을 때 프로이센 정부가 너무 쉽게 그것을 수용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고서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조국의 군대를 떠났다.
1812년의 전쟁에서 그는 러시아군에 입대해 참전했다. 이때 그는 대령 계급이었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관전자 이상의 주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종전 무렵에 프로이센군 군단장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Yorck von Wartenburg) 장군을 찾아가 나폴레옹 군대에서 이탈, 전향하도록 설득함으로써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프로이센이 드디어 1813년에 반기를 들고 대(對) 프랑스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이보다 앞선 클라우제비츠의 행동들은 모두 정당화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는 클라우제비츠의 프로이센군 복귀 요청을 상당 기간 동안 거절했다. 그의 과거 돌출적 행동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에 복귀한 클라우제비츠는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百日天下) 시절에 제3군단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이 군단은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그루시(Grouchy) 군단을 묶어 놓는 중요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군부 내에서 늘 보수파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 최고위급 요직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1818년에 그는 당시 비교적 한가한 행정직인 베를린 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덕분에 오랫동안 중단한 연구를 재개함으로써 한직은 오히려 그를 위대한 전쟁 이론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스승 샤른호르스트의 전기를 집필하고 그 밖에 많은 독창적인 정치 및 군사 관련 논문들을 저술했다. 그리고 역작 ≪전쟁론≫을 집필하는데 1819년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에 걸쳐 온 정열을 다 바쳤다. 하지만 초고 집필을 마친 뒤, 세심하게 수정 작업을 하던 중에 1831년 콜레라에 감염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이듬해에 그의 부인이 유고를 모아 출판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전쟁론≫은 하나의 미완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1780년 6월 1일 프로이센의 작은 도시 부르크에서 중산층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12살의 나이에 소년병으로 입대한 그는 프랑스혁명 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벌인 싸움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했으며 1831년 11월 16일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군에서 보낸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1803년 베를린 정규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당시 프로이센군 개혁의 기수였던 사관학교 교장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중령의 총애를 받았으며 졸업 후 장교 생활 중에도 줄곧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클라우제비츠에게 샤른호르스트는 그의 말대로 “정신적인 아버지이자 친구”였다.
임관하자마자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천거로 프로이센의 젊은 황태자 아우구스트(August)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그는 궁중 출입을 자주 하면서 여왕의 시녀였던 마리 폰 브륄(Marie von Bruhl)을 만나 결혼했다.
1806년 나폴레옹군과 맞서 싸운 아우에르슈테트(Auerstadt) 전투에서 그는 황태자 아우구스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혀 1년 동안 파리에 억류되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뒤 그는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핵심 참모로 기용되었으며 프로이센군의 개혁과 개편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일련의 개혁 논쟁에서 인력 정책과 군기 및 훈련 제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당시 군내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그 바람에 과격주의자라는 평판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는 무엇보다도 프로이센 정부의 프랑스에 대한 굴욕적인 종속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 지원을 요구해 왔을 때 프로이센 정부가 너무 쉽게 그것을 수용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고서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조국의 군대를 떠났다.
1812년의 전쟁에서 그는 러시아군에 입대해 참전했다. 이때 그는 대령 계급이었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관전자 이상의 주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종전 무렵에 프로이센군 군단장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Yorck von Wartenburg) 장군을 찾아가 나폴레옹 군대에서 이탈, 전향하도록 설득함으로써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프로이센이 드디어 1813년에 반기를 들고 대(對) 프랑스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이보다 앞선 클라우제비츠의 행동들은 모두 정당화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는 클라우제비츠의 프로이센군 복귀 요청을 상당 기간 동안 거절했다. 그의 과거 돌출적 행동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에 복귀한 클라우제비츠는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百日天下) 시절에 제3군단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이 군단은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그루시(Grouchy) 군단을 묶어 놓는 중요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군부 내에서 늘 보수파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 최고위급 요직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1818년에 그는 당시 비교적 한가한 행정직인 베를린 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덕분에 오랫동안 중단한 연구를 재개함으로써 한직은 오히려 그를 위대한 전쟁 이론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스승 샤른호르스트의 전기를 집필하고 그 밖에 많은 독창적인 정치 및 군사 관련 논문들을 저술했다. 그리고 역작 ≪전쟁론≫을 집필하는데 1819년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에 걸쳐 온 정열을 다 바쳤다. 하지만 초고 집필을 마친 뒤, 세심하게 수정 작업을 하던 중에 1831년 콜레라에 감염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이듬해에 그의 부인이 유고를 모아 출판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전쟁론≫은 하나의 미완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