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서관 창업주
일제강점기의 출판인이자 언론인이다.
생애
신상 정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 시기에 양기탁, 주시경, 이준 등 개화파 청년들과 가까이 지낸 인물이었다. 주시경이 교사를 맡았던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설립에 찬조금을 내 도운 바 있고, 주시경 번역으로 《월남망국사》를 출판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경성부에서 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다.[2] 1938년 《조광》과의 인터뷰에서, 개화기의 상황을 언급하며 "그때 우리 조선에도 신문화가 수입되기 시작하는데 역시 책전 같은 것도 필요"할 것으로 보고 출판사를 설립했다고 말한 바 있다.[3] 이때 노익형은 출판사 겸 서점인 박문서관의 경영인 자격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잡지 《신시대》를 발행하는 신시대사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 겸 발행인을 지냈다. 《신시대》는 월간 잡지로 《박문》의 자매지였으며, "시국하 반도민중에게 필요한 일체의 국민지식과 훈련과 사상의 보급, 전달"을 목표로 삼는 전형적인 친일 매체였다.
노익형은 이 잡지를 통해 전쟁 수행과 근로 동원에 적극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함흥, 청진, 대구에 지사를 두고 도쿄와 오사카시에도 지사가 있었다. 초기에는 일부 지면을 활용하여 일본어 기사를 실었으나, 곧 내선일체 취지에 맞도록 일본어와 한국어를 혼용하고 집필도 일본인과 한국인인 공동으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신시대사의 제2대 발행인은 아들인 노성석이 이어 맡았다.[4] 이밖에 경성상공협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박문서관 창업주
일제강점기의 출판인이자 언론인이다.
생애
신상 정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 시기에 양기탁, 주시경, 이준 등 개화파 청년들과 가까이 지낸 인물이었다. 주시경이 교사를 맡았던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설립에 찬조금을 내 도운 바 있고, 주시경 번역으로 《월남망국사》를 출판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경성부에서 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다.[2] 1938년 《조광》과의 인터뷰에서, 개화기의 상황을 언급하며 "그때 우리 조선에도 신문화가 수입되기 시작하는데 역시 책전 같은 것도 필요"할 것으로 보고 출판사를 설립했다고 말한 바 있다.[3] 이때 노익형은 출판사 겸 서점인 박문서관의 경영인 자격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잡지 《신시대》를 발행하는 신시대사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 겸 발행인을 지냈다. 《신시대》는 월간 잡지로 《박문》의 자매지였으며, "시국하 반도민중에게 필요한 일체의 국민지식과 훈련과 사상의 보급, 전달"을 목표로 삼는 전형적인 친일 매체였다.
노익형은 이 잡지를 통해 전쟁 수행과 근로 동원에 적극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함흥, 청진, 대구에 지사를 두고 도쿄와 오사카시에도 지사가 있었다. 초기에는 일부 지면을 활용하여 일본어 기사를 실었으나, 곧 내선일체 취지에 맞도록 일본어와 한국어를 혼용하고 집필도 일본인과 한국인인 공동으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신시대사의 제2대 발행인은 아들인 노성석이 이어 맡았다.[4] 이밖에 경성상공협회의 이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