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이미지를 질서화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서구에서 이미지를 질서화하려는 의지가 가장 본격적으로 그리고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르네상스시대였다. 르네상스시대에 발명된 ‘원근법’은 이미지를 길들이는 가장 확실한 도구로 당대의 수치 계량적 세계관을 화폭 위에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질서화의 의지는 르네상스의 정점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완성한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매너리즘기의 화가들이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방식으로 고전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재현하는 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진리’에 다가가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는 없다. 공백으로서의 ‘진리’로의 접근은 기존의 시각적 재현의 질서를 완전히 전복하는 유령이미지들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구 미술사에서 진리의 공백에 가장 근접하는 유령이미지를 창조한 예술가는 카라바조와 고야, 그리고 이 책의 3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현대의 해체주의 예술가들이었다.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카라바조는 저잣거리의 부랑아들을 성화 속 인물들의 모델로 삼음으로써 1500년 동안 지속되어온 기독교적 이미지 재현의 역사에 반기를 들었고,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에서 그린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 연작’을 통해 오랫동안 성서나 신화라는 고전적 의미 체계에 갇혀 있던 이미지를 해방시켰다. 20세기 이후 유령이미지를 창조한 현대 예술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 논리와 매끈한 진리의 평면을 형성한 매스미디어 이미지에 대항해 진리의 공백을 다양한 이미지들의 매혹을 통해 보여주었다. 저자가 20세기의 진정한 풍경화가라고 지칭한 앤디 워홀은 반복 속에서도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얼룩을 만들어내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체계에 반하는 유령이미지를 만들었고,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초점이 나간 듯한 희미한 이미지를 통해 매스미디어 이미지의 거짓 선명함에 저항하는 유령이미지를 만들었다.
물론 예술작품 속 유령이미지를 한번 본 것으로 우리를 둘러싼 기만적 현실이 일거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우리 삶에서 반복될 때, 그리고 어느 날 우리가 삶 속에서 스스로 유령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행동하는 주체로서 라캉이 이야기한 윤리적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항하고, 새로운 자아의 창조로 나아가는 출발선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을 통한 유령이미지의 체험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Contents
프롤로그 루브르에서 유령을 만나다
1부 르네상스, 이미지 사냥의 시대
이미지를 길들이는 주술로서의 회화
마녀사냥, 초과하는 이미지에 대한 심판
수학적으로 거세된 이미지들
응시의 저주
카라바조, 유령적 사건의 회화
고야, 르네상스의 종말과 유령이미지
이미지의 에티카
2부 자본주의, 성도착적 이미지의 시대
광기의 상품화
매스미디어, 외부 없는 세계의 스크린
거세된 이미지의 유토피아
3부 현대 미술은 어떻게 유령이 되었나?
20세기 이후, 미술과 진리의 새로운 관계
스기모토 히로시, 이미지의 거식증
앤디 워홀, 20세기의 풍경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빗금 쳐진 이미지
소피 칼, 승화 게임
빌 비올라, 시간의 영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