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집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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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1/12/31
Pages/Weight/Size 153*224*30mm
ISBN 9791155505168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이 책에서 번역 대상으로 삼은 것은 1843년(헌종9)에 전사자(全史字)로 간행된 『이계집』 초간본이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8-홍양호-이)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241집?242집)에 수록되어 있다. 권수(卷首)의 앞에는 저자가 1차 연행 시에 아들 홍희준을 기균에게 보내 받은 시집과 문집의 서문 2편이 실려 있다. 그 뒤에 총목(總目)이 있고, 세부 목록은 권별로 따로 있다.

이계 홍양호는 18세기의 대표적인 경세가이자 실학적 사유를 지닌 개명적 지식인으로 평생 관료의 길을 걸었음에도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문학과 역사는 물론 역사지리와 문자학과 경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에 두루 걸쳐 있다. 더욱이 이계의 세계관과 사유 방식은 실학파와 상통하면서도, 문학세계는 실학파 문인들이 제기한 것보다도 오히려 다채롭고 풍부하며 민족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이계의 문학과 사상, 사유 방식과 학문 세계 등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이계집』은 충분하지 않으며, 향후 방대한 자료를 수록한 『이계선생삼편전서』를 선택하여 완역하는 것이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비록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계 홍양호를 조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문헌으로 『이계집』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참고할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의 정치와 문화, 학술과 문학 등을 조망하고자 한다면, 이계 홍양호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요한 인물이다. 또한 홍양호가 18세기에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어, 당시 학술사와 문학사를 조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계에 대한 깊고 넓은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이 무궁무진하고 내용도 다양하고 풍부한 『이계집』은 18세기를 조망하고 이해하는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문헌이다. 지금까지 이계 홍양호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이계집』 완역은 이계 홍양호와 당시 정치와 문화, 학술과 문학 등을 더 깊고 넓게 파악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Contents
일러두기

이계집 제35권

묘표墓表

이계집 제36권

시장諡狀

이계집 제37권

시장諡狀

이계집 제38권

시장諡狀

발문
Author
홍양호,김채식,임영걸
1724(경종4)~1802(순조2). 본관은 풍산(?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홍진보(洪鎭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숙인 저촌(樗村) 심육(沈?)에게 수학(受學{)하였다. 24세(1747, 영조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1752, 영조28)에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70세(1793, 정조17)에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차례 대제학을 맡아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59세(1782, 정조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71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문장은 육경(六經)에 근본하고 제자(諸子)를 참작하여 순정하고 웅혼하며 법도가 구비되어 있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는 시속(時俗)에 구애받거나 수식을 일삼는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심의 발현을 주장한 천기론(天機論)으로 발현된다. 또한 청(淸)나라 기윤(紀?)으로부터 화평하고 온유하여 기교와 수식이 없고 국계와 민생을 항상 잊지 않아 음풍농월(吟風弄月) 하는 기습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국토와 백성의 현실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민요나 설화 등 민족 문학의 성취를 수용한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정조 중흥기에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와 문학 양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관인이자 학자이자 문인이라 할 수 있다.
1724(경종4)~1802(순조2). 본관은 풍산(?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홍진보(洪鎭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숙인 저촌(樗村) 심육(沈?)에게 수학(受學{)하였다. 24세(1747, 영조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1752, 영조28)에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70세(1793, 정조17)에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차례 대제학을 맡아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59세(1782, 정조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71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문장은 육경(六經)에 근본하고 제자(諸子)를 참작하여 순정하고 웅혼하며 법도가 구비되어 있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는 시속(時俗)에 구애받거나 수식을 일삼는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심의 발현을 주장한 천기론(天機論)으로 발현된다. 또한 청(淸)나라 기윤(紀?)으로부터 화평하고 온유하여 기교와 수식이 없고 국계와 민생을 항상 잊지 않아 음풍농월(吟風弄月) 하는 기습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국토와 백성의 현실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민요나 설화 등 민족 문학의 성취를 수용한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정조 중흥기에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와 문학 양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관인이자 학자이자 문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