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재학 중 스승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과 말본을 배우며 우리말·글 연구에 평생을 매진하는 계기를 갖는다. 졸업 후에는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 경남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의 교원으로 있다가 다시 유학을 결심한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교토 제국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그해 동 대학원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를 겸직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제로 쫓겨나는데 오히려 이 시기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우리말·글 연구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에 복직했으나 도서관 일을 맡는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른다. 해방 후에는 조선어학회 상무이사,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내고 이후에도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과 부총장, 한글 기계화 연구소 소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역임한다.
이렇게 우리말·글 연구와 교육활동에 평생을 다 바친 최현배는 1970년 3월 23일 생을 마감한다. 정부는 이런 최현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고 1970년 서거 이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민족갱생의 도”, “우리말본”, “한글갈”, “글자의 혁명”,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민주주의와 국민도덕”, “한글의 투쟁”, “고등말본”, “중등말본” Ⅰ~Ⅲ, “나라사랑의 길”, “고친 한글갈”, “나라 건지는 교육”, “한글 가로글씨 독본”, “한글만 쓰기의 주장”(유고) 등이 있다.
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재학 중 스승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과 말본을 배우며 우리말·글 연구에 평생을 매진하는 계기를 갖는다. 졸업 후에는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 경남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의 교원으로 있다가 다시 유학을 결심한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교토 제국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그해 동 대학원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를 겸직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제로 쫓겨나는데 오히려 이 시기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우리말·글 연구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에 복직했으나 도서관 일을 맡는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른다. 해방 후에는 조선어학회 상무이사,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내고 이후에도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과 부총장, 한글 기계화 연구소 소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역임한다.
이렇게 우리말·글 연구와 교육활동에 평생을 다 바친 최현배는 1970년 3월 23일 생을 마감한다. 정부는 이런 최현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고 1970년 서거 이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민족갱생의 도”, “우리말본”, “한글갈”, “글자의 혁명”,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민주주의와 국민도덕”, “한글의 투쟁”, “고등말본”, “중등말본” Ⅰ~Ⅲ, “나라사랑의 길”, “고친 한글갈”, “나라 건지는 교육”, “한글 가로글씨 독본”, “한글만 쓰기의 주장”(유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