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관은 1903년 1월 31일 중국 호북성 희수현(?水縣) 서가요(徐家?) 마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기초교육을 받았고, 무창 제일고등사범학교(1918-1923)와 국학관(1923-1926)에서 엄격한 국학 훈련을 받았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대량 흡수하였으며, 경제적 지원 부족으로 1929년 일본 사관학교 중국팀 23기에 입학하였다. 1931년 9·18사건으로 귀국하여 군직을 맡았다. 1937년 낭자관(娘子關) 전투와 1938년 무한(武漢) 보위전 실전에 참여하였다.
1943년 5월에서 10월 사이 군령부 소장(少將) 연락참모로 연안(延安)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와 여러 차례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다. 중경(重慶)으로 돌아간 후, 「중공 최신 동태」보고서로 장개석(蔣介石)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막료로 발탁되어 점차 최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8년 3월 소작농이 소작료를 토지 매입비로 하여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토지개혁 방안을 제출하였고 이 방안은 1953년 대만에서 시행되었다. 1951년 이념이 맞지 않아 국민당을 탈당하고 대학에 부임하면서 학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10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유일하게 군사·정치의 실무 경험을 갖춘 유교학자였다.
서복관은 공자와 맹자 및 『논어』를 종지로 삼고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도는 반드시 보편적인 실천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이래 중국의 학자들이 다투어 서양을 모방하고 사변(思辨)적 방법으로 중국 전통사상을 ‘철학화(哲學化)’하는 데만 전념해 온 학문적 성과는 ‘관념의 유희’일 뿐 공자·맹자의 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서복관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해 개척된 세계는 현실 생활 속의 ‘정상인(正常人)’의 세계이다. 사람과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들어갈 수 있는 평안한 세계이다. 사람이 플라톤의 이상형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헤겔의 절대정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서복관의 연구는 사상사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는 선진(先秦) 사상이 전제(專制) 통치를 거치면서 왜곡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 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는 민주 정신을 다시 활짝 터놓아 흐르게 하고 싶다. 이것은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는[爲往聖繼?學]’ 일이다. 그것은 일부 정신으로 하여금 민주 정치를 지지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여는[爲萬世開太平]’ 일이다[역주: “爲往聖繼?學, 爲萬世開太平”은 장재(張載)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가 민주적이지 않으면 태평도 있을 수 없다.”
저서로는 『중국사상사논집』(1959), 『중국인성론사―선진편』(1963), 『중국예술정신』(1966), 『중국문학논집』(1966), 『공손룡자강소(公孫龍子講疏)』(1966), 『석도지일연구(石濤之一?究)』(1969), 『양한사상사』 권1(1972), 『양한사상사』 권2(1976), 『황대치양산수장권적진위문제(黃大癡兩山水長卷的眞僞問題)』(1977), 『양한사상사』 권3(1979), 『유가정치사상여민주자유인권(儒家政治思想與民主自由人權)』(문집, 1979), 『주관성립지시대급기사상성격(周官成立之時代及其思想性格)』(1980), 『중국문학논집속편』(1981), 『중국사상사논집속편』(1982), 『중국경학사적기초』(1982) 등이 있다. 1982년 4월 1일 별세하였다.
중국의 고난시대를 겪으며 서복관은 강한 ‘서민적 줄거리’[곽제용(郭齊勇) 교수의 말]를 가진 300여만 자의 시사평론을 썼으며, 1949년부터 1982년까지 대만과 홍콩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였다.
서복관은 1903년 1월 31일 중국 호북성 희수현(?水縣) 서가요(徐家?) 마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기초교육을 받았고, 무창 제일고등사범학교(1918-1923)와 국학관(1923-1926)에서 엄격한 국학 훈련을 받았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대량 흡수하였으며, 경제적 지원 부족으로 1929년 일본 사관학교 중국팀 23기에 입학하였다. 1931년 9·18사건으로 귀국하여 군직을 맡았다. 1937년 낭자관(娘子關) 전투와 1938년 무한(武漢) 보위전 실전에 참여하였다.
1943년 5월에서 10월 사이 군령부 소장(少將) 연락참모로 연안(延安)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와 여러 차례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다. 중경(重慶)으로 돌아간 후, 「중공 최신 동태」보고서로 장개석(蔣介石)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막료로 발탁되어 점차 최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8년 3월 소작농이 소작료를 토지 매입비로 하여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토지개혁 방안을 제출하였고 이 방안은 1953년 대만에서 시행되었다. 1951년 이념이 맞지 않아 국민당을 탈당하고 대학에 부임하면서 학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10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유일하게 군사·정치의 실무 경험을 갖춘 유교학자였다.
서복관은 공자와 맹자 및 『논어』를 종지로 삼고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도는 반드시 보편적인 실천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이래 중국의 학자들이 다투어 서양을 모방하고 사변(思辨)적 방법으로 중국 전통사상을 ‘철학화(哲學化)’하는 데만 전념해 온 학문적 성과는 ‘관념의 유희’일 뿐 공자·맹자의 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서복관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해 개척된 세계는 현실 생활 속의 ‘정상인(正常人)’의 세계이다. 사람과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들어갈 수 있는 평안한 세계이다. 사람이 플라톤의 이상형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헤겔의 절대정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서복관의 연구는 사상사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는 선진(先秦) 사상이 전제(專制) 통치를 거치면서 왜곡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 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는 민주 정신을 다시 활짝 터놓아 흐르게 하고 싶다. 이것은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는[爲往聖繼?學]’ 일이다. 그것은 일부 정신으로 하여금 민주 정치를 지지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여는[爲萬世開太平]’ 일이다[역주: “爲往聖繼?學, 爲萬世開太平”은 장재(張載)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가 민주적이지 않으면 태평도 있을 수 없다.”
저서로는 『중국사상사논집』(1959), 『중국인성론사―선진편』(1963), 『중국예술정신』(1966), 『중국문학논집』(1966), 『공손룡자강소(公孫龍子講疏)』(1966), 『석도지일연구(石濤之一?究)』(1969), 『양한사상사』 권1(1972), 『양한사상사』 권2(1976), 『황대치양산수장권적진위문제(黃大癡兩山水長卷的眞僞問題)』(1977), 『양한사상사』 권3(1979), 『유가정치사상여민주자유인권(儒家政治思想與民主自由人權)』(문집, 1979), 『주관성립지시대급기사상성격(周官成立之時代及其思想性格)』(1980), 『중국문학논집속편』(1981), 『중국사상사논집속편』(1982), 『중국경학사적기초』(1982) 등이 있다. 1982년 4월 1일 별세하였다.
중국의 고난시대를 겪으며 서복관은 강한 ‘서민적 줄거리’[곽제용(郭齊勇) 교수의 말]를 가진 300여만 자의 시사평론을 썼으며, 1949년부터 1982년까지 대만과 홍콩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