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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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11/25
Pages/Weight/Size 152*224*40mm
ISBN 9791160871197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춘추전국시대, 초한지제 제후국의 흥망성쇠를 다룬 『사기세가史記世家』,
정치가 답답하고 경제가 막히며 인간사의 지혜가 절실할 때
선현들은 서슴없이 이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열전」을 도입함으로써 중국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기』. 그러나 『사기』에서 가장 전통적인 역사 서술 형식인 「세가」는 『사기』 이전에도 없었고 『사기』 이후로도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여 태어난 기전체는 『한서』가 그대로 계승하면서 이후 즉시 정사체로 자리 잡았다. 기전체는 「본기」와 「세가」, 「표」, 「서」, 「열전」의 다섯 체제를 갖춘 것을 말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본기」와 「열전」만 갖추면 기전체로 인정된다. 실제로 『후한서』 같이 「표」와 「서」(또는 「志」)를 나중에 보충해서 완성한 예도 있다. 통상적으로 25사로 불리는 정사체에서 『사기』에만 있는 체제가 있는데 바로 「세가」이다. 「세가」는 제후국과 제후의 역사를 다룬 가장 전통적인 역사 서술 형식인데, 은나라 이전은 「본기」로만 다루었고 한나라 이후로는 군국제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사기』 「세가」는 주나라에서 분봉된 주요 제후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춘추시대의 강대국인 진(晉)나라는 물론 진이 큰 가신들에 의해 한(韓)·위(魏)·조(趙) 세 나라로 분할되어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과정과 이름은 유지하되 전(田) 씨가 강(姜) 씨의 나라를 찬탈한 제나라의 경우도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 주요 국가가 큰 틀을 이룬다. 이 외에 큰 틀에서 「열전」에 들어가야 할 한(漢)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제후에 봉하여진 인물들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공자와 진승의 경우는 사마천 개인적인 사관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사기』에만 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생생한 역사를 눈에 잡힐 듯이 보여주는 「세가」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인 역사 서술 형식이라고 하겠다.
Contents
서문: 간단한 해제를 겸하여
일러두기

1 ― 오태백 세가 吳太伯 世家
2 ― 제태공 세가 齊太公 世家
3 ― 노주공 세가 魯周公 世家
4 ― 연소공 세가 燕召公 世家
5 ― 관채 세가 管蔡世家
6 ― 진기 세가 陳杞世家
7 ― 위강숙 세가 衞康叔 世家
8 ― 송미자 세가 宋微子世家
9 ― 진 세가 晉世家
10 ― 초 세가 楚世家
11 ― 월왕 구천 세가 越王句踐世家
12 ― 정 세가 鄭世家
Author
사마천,장세후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제례를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기원전 112년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 서남이(오늘날의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릉의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했다가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궁형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사마천의 죽음(기원전 91년 무렵)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제례를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기원전 112년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 서남이(오늘날의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릉의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했다가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궁형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사마천의 죽음(기원전 91년 무렵)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