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程顥와 정이程? 형제는 북송北宋 때 신유학을 일으키는 데 크게 공헌한 학자로서, 합칭하여 이정二程이라 부른다. 정호의 자字는 백순伯淳, 호號는 명도明道이며, 정이의 자字는 정숙正叔, 호號는 이천伊川이다. 정자程子는 이정 형제를 존칭하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맹자孟子 이후 끊어진 도道를 이정二程이 다시 이었다고 하여,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로 이어진 도통道統이 정자程子에게서 다시 계승되었음을 천명하였다.
정호는 15∼16세 때 부친의 명으로 주돈이周敦?에게 나아가 수학하였고,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경조부京兆府 호현주부?縣主簿에 임명되었다. 38세 때 태자중윤太子中允 감찰어사리행監察御史裏行에 제수되자 신종神宗에게 [논십사차자論十事箚子]를 올려 국가의 중대사 10가지를 논하였다. 1085년 문하시랑 사마광司馬光이 정호를 불러 종정사승宗正寺丞을 삼았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해 6월 별세하였다. 문언박文彦博이 지은 묘비에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 칭하였다. 정호는 덕성德性이 충만하고 완전하며, 순수하고 화락한 기상이 밖으로 흘러넘치며, 미목眉目이 맑고 준수하고 말소리가 또렷했다고 하며, 하루 종일 소상塑像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정이는 14∼15세 때 형과 함께 주돈이에게 수학하였고, 18세 때 인종仁宗에게 상서上書하여 왕도王道에 대해 진언하였다. 27세 때 정시廷試에서 낙방한 뒤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소옹邵雍을 방문하여 『주역周易』을 해설하면서 도를 논하였고, 장재張載를 만나 도학道學을 논하였으며, 관중關中으로 가서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정이는 낙양성洛陽城 남쪽에 이천서원伊川書院을 세워 저술활동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이천학파伊川學派를 형성하였다.
철종哲宗이 즉위한 뒤 서경西京 국자감國子監 교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086년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에 제수되어 태황태후를 알현했으며, 이듬해 수렴청정垂簾聽政에 대해 상소上疏하였다. 정이는 당시 대립하던 촉당蜀黨?삭당朔黨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여, 1090년 부친상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094년 철종哲宗이 변법사업變法事業을 추진하면서, 정이는 신법을 반대한 간당奸黨으로 지목되어 축출되고 유배되었다. 정이는 유배생활 중에 『주역周易』에 전심하여 1099년 『역전易傳』을 완성하였다. 1102년 신법을 다시 시행하면서 간당奸黨으로 지목되었으며, 1103년 탄핵을 당하여 물러나 은거하다가 1107년 집에서 졸卒하였다.
이들 형제는 이학理學을 위주로 하는 낙학洛學을 성립하였고, 이들의 낙학이 신유학을 집대성한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로 이어지게 되었다. 곧 주자학의 연원은 이정의 학문과 사상에 있다 하겠고, 그들이 저술한 『이정전서二程全書』는 주희의 『주자전서朱子全書』에 버금갈 정도로 소중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