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여행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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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0/09/21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91137218529
Categories 인문 > 인문/교양
Description
몽테뉴는 『에세』의 저자로 친숙하다. 그러나 몽테뉴가 죽은 지 182년 뒤인 1774년에 파리에서 그의 『여행일기』가 출간되었다. 이 『여행일기』의 원고는 1770년경에 페리고 지방의 역사학자가 몽테뉴 성의 한 궤짝 안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몽테뉴는 1580년 6월 22일 몽테뉴 성을 나와 파리로 향했다. 『에세』(처음 두 권)의 출간에 즈음해 국왕을 알현하고, 여행을 떠난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몽테뉴는 바로 여행길에 오르지 못하고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40킬로미터 떨어진 라페르로 갔다. 그곳에서는 마티뇽 원수가 도시를 포위한 채 콩테 공작 휘하의 프로테스탄트 군대와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라페르 포위전에서 8월 6일 몽테뉴와 동향인 필리베르 드 그라몽 백작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고, 몽테뉴는 이 친구의 유해를 남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수아송으로 옮겨 그라몽 백작부인에게 인계했다. 그런 뒤에야 몽테뉴는 다시 파리 북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보몽으로 가서 데스티사크 일행과 합류했고, 거기서부터 그의 『여행일기』는 시작한다.

몽테뉴는 1580년 6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17개월 동안 프랑스 북동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몽테뉴는 인문주의자답게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했고, 베네치아와 피렌체를 거쳐 로마로 갔다. 몽테뉴는 폼페이우스와 브루투스의 잔영이 서린 로마를 동경했다. 루카의 유명한 온천도 방문할 요량이었다. 만일 몽테뉴가 1581년 8월 보르도 시장으로 선출되어 귀국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이 ‘로마의 시민’은 여행을 계속하여 처음 생각대로 인적이 뜸한 크라쿠프와 그리스까지 방문했을 지도 모른다. 몽테뉴는 왜 여행길에 올랐을까?

몽테뉴는 부친으로부터 영지를 물려받고 성의 옥탑방에 칩거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실험적 글쓰기에 몰두했다. 이제 그 결과물도 세상에 나왔고, 주변의 평가도 호의적이니 몽테뉴는 한숨 돌리고픈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또, 이참에 지난 2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신장결석을 치료할 목적으로 온천 여행을 계획했을 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단지 버거운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몽테뉴는 ‘집에서보다 안장 위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평소 여행 경비를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몽테뉴는 『에세』를 출간한 직후 길을 나섰다. 몽테뉴 일행은 그보다 스물일곱 살이나 어린 막내 동생 마트쿨릉, 여동생 마리의 남편 카즐리스, 비서, 하인 등 전부 여섯 명이었고, 보몽에서 합류한 샤를 데스티사크 경의 일행 또한 여섯 명이었다. 하나같이 지체 높은 양반들이다보니 이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몽테뉴는 모범적인 여행자였다. 몽테뉴는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호기심어린 태도로 주시하며 타인의 시각에서 매우 상세히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 그곳의 풍습을 따르고, 현지인들처럼 행동하면서 그들의 생활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몽테뉴의 『여행일기』에 이방인의 시선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몽테뉴는 여행의 목적으로서 개인적인 탕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몽테뉴의 『여행일기』 곳곳에는 그가 방문했던 여러 온천들의 모습, 그가 마셨던 광천수의 효능, 그가 배출했던 결석의 상태 등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몽테뉴 개인의 치료 일지인 셈이다. 몽테뉴의 『여행일기』는 출간을 염두에 두고 저술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기의 절반가량을 몽테뉴 자신이 쓰지도 않았다. 동행한 비서가 그날 하루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다. 보통 몽테뉴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은 것이었지만, 간혹 비서의 개인적인 주관이 들어가기도 했다. 또, 며칠을 한 번에 몰아서 작성한 경우도 있다. 로마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테뉴는 대뜸 이 유능한 비서를 해고해버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록해 놓은 것도 있고 하니 아무리 귀찮더라도 이제부터는 자신이 직접 일기를 작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다시 절반은 서툰 이탈리아어로 작성했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이탈리아어로 일기를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여행일기』는 형식적으로 엉성한 글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그 ‘헐렁함’ 이면에 ‘솔직함’이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세』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몽테뉴는 공언하고 있지만, 그의 생전에 출간된 책에서 타인에 대한 의식과 자신에 대한 왜곡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에 비하면 『여행일기』는 낯선 곳에서 한 여행자가 자신의 속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매우 개인적인 기록임에 틀림없다.
Contents
옮긴이 말 / 8

프랑스에서 스위스 (1580) / 14

9월 5일
보몽(BEAUMONT)에서 식사 후 여행을 시작. 모(MEAUX)에서 저녁 식사.

9월 6일
저녁 무렵에 샤를리(CHARLY) 도착.

9월 7일
도르망(DORMANS)에서 숙박.

9월 8일
에페르네(ESPRENAI) 도착. 말도나도 수사를 만남.

9월 9일
샬롱(CHAALONS)의 쿠론 여관 도착.

9월 10일
점심을 먹고 비트리 르 프랑수아(VITRI LE FRANCOIS)로 여행

9월 11일
아침을 먹고 바르(BAR)를 향해 출발.

9월 12일
모바주(MANNESE)에 도착.

9월 13일
점심 때 보쿨뢰르(VAUCOULEUR)에 도착. 동레미(DONREMY)를 경유하여 뇌샤토(NEUFCASTEAU)에서 숙박.

9월 14일
여행을 계속함. 미르쿠르(MIRECOURT)에서 저녁 식사.

9월 15일
푸사이 수녀원을 잠시 방문하고 에피날(ESPINE)을 향해 떠남.

9월 16일
한낮에 플롱비에르(PLOMMIERES) 도착. 9월 27일까지 앙쥬 여관에 투숙.

9월 27일
여행을 계속함. 르미르몽(REMIREMONT)에서 리코흔 여관에 묵음.

9월 28일
뷔생(BOSSAN)에서 점심 식사. 저녁 무렵 탄(TANE)에 도착.

스위스 (1580) / 60

9월 29일
정오 쯤 뮐하우젠(MELHOUSE)에 도착. 바젤(BASLE)에서 숙박. 10월 1일까지 체류

10월 1일
호른(HORNES)에 도착하여 숙박. 오스트리아 공작령.

10월 2일
점심 식사. 브루그에서 아레강을 건너 수도원 방문. 바덴(BADE)에 도착. 10월 7일까지 체류.

10월 7일
아침 먹고 출발. 카이저슈틀에서 라인강을 건너 샤프하우젠(SCHAFFOUSE)에 도착.

몽테뉴 연보 / 118
미주 / 122
Author
몽테뉴,김성훈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최고의 교양인, 사상가, 철학자, 때로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도 하는 몽테뉴. 그러나 곧 덧붙여 말해야 한다. 그는 당대 인문학자들과 달리 라틴어가 아닌 속어(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나아가 장바닥의 생생한 말로만 쓰고 싶다고 한 교양인이요, 어려운 개념도 체계도 교화적 목적도 없이, 누구나 부딪히는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온당한 답, 주어진 삶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길을 찾고자 하는 보통 사람의 “자기 탐구”로 사상가, 철학자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내란으로 분열된 나라에서 중재자로, 보르도의 시장으로 일했지만, 공적 생활에 염증을 느껴 서른여덟 살에 은퇴하여 ‘자기만의 방’으로 물러났고, 왕이 하사하는 은전을 거절하고, 억지로 시장직을 맡았으며, 사적 삶의 문제로도 벅찬 사람으로서, 공적인 일에 ‘손’과 ‘어깨’까지는 빌려줄 수 있어도 그 일을 ‘간과 폐’에 담지는 않겠다고 공언한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면서, 유대인 핍박과 신대륙에서 저지른 유럽인들의 잔인한 행위를 큰 소리로 비판한 유일한 문인이요, 농부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교훈을 얻은 사람, 그가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여기 20여 년 동안 써 내려간 『에세』에서 그의 시대만큼 혼란스런 시대를 사는 21세기 독자에게 들려준다.

1533년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성(현재의 생 미셸 드 몽테뉴 마을)에서 태어났다. 6세가 되어 보르도에 있는 귀엔 학교에 입학해 고전 공부에 열중했으며 13세에 전 과정을 마쳤다. 16세부터 툴루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해 1557년에 보르도 고등법원 심사관이 되었고 1568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의 영주가 되었다. 1570년 법관생활에서 은퇴했는데, 은퇴 후에 신·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렸다. 프랑스의 광신적인 종교 시민전쟁 와중에 종교에 대한 관용을 지지했고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했으며 그러한 견해를 알리기 위해 ‘엣세essai’라는 독특한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 1580년 그간 써둔 수필을 간추려 『인생 에세이』(2권)를 보르도에서 간행했고, 신장결석 치료를 겸해 유럽 관광길에 올라 1년 넘게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1774년 『여행기』를 집필했다. 1586년 몽테뉴 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그 뒤에도 집필을 계속해 1588년 3권 107장에 이르는 『수상록』 신판을 간행했다. 『수상록』은 1676~1854년 성서를 인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티칸 금서 목록에 올랐으나 몽테뉴는 평생 온건한 가톨릭 신자였다. 1592년 59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최고의 교양인, 사상가, 철학자, 때로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도 하는 몽테뉴. 그러나 곧 덧붙여 말해야 한다. 그는 당대 인문학자들과 달리 라틴어가 아닌 속어(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나아가 장바닥의 생생한 말로만 쓰고 싶다고 한 교양인이요, 어려운 개념도 체계도 교화적 목적도 없이, 누구나 부딪히는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온당한 답, 주어진 삶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길을 찾고자 하는 보통 사람의 “자기 탐구”로 사상가, 철학자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내란으로 분열된 나라에서 중재자로, 보르도의 시장으로 일했지만, 공적 생활에 염증을 느껴 서른여덟 살에 은퇴하여 ‘자기만의 방’으로 물러났고, 왕이 하사하는 은전을 거절하고, 억지로 시장직을 맡았으며, 사적 삶의 문제로도 벅찬 사람으로서, 공적인 일에 ‘손’과 ‘어깨’까지는 빌려줄 수 있어도 그 일을 ‘간과 폐’에 담지는 않겠다고 공언한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면서, 유대인 핍박과 신대륙에서 저지른 유럽인들의 잔인한 행위를 큰 소리로 비판한 유일한 문인이요, 농부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교훈을 얻은 사람, 그가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여기 20여 년 동안 써 내려간 『에세』에서 그의 시대만큼 혼란스런 시대를 사는 21세기 독자에게 들려준다.

1533년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성(현재의 생 미셸 드 몽테뉴 마을)에서 태어났다. 6세가 되어 보르도에 있는 귀엔 학교에 입학해 고전 공부에 열중했으며 13세에 전 과정을 마쳤다. 16세부터 툴루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해 1557년에 보르도 고등법원 심사관이 되었고 1568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의 영주가 되었다. 1570년 법관생활에서 은퇴했는데, 은퇴 후에 신·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렸다. 프랑스의 광신적인 종교 시민전쟁 와중에 종교에 대한 관용을 지지했고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했으며 그러한 견해를 알리기 위해 ‘엣세essai’라는 독특한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 1580년 그간 써둔 수필을 간추려 『인생 에세이』(2권)를 보르도에서 간행했고, 신장결석 치료를 겸해 유럽 관광길에 올라 1년 넘게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1774년 『여행기』를 집필했다. 1586년 몽테뉴 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그 뒤에도 집필을 계속해 1588년 3권 107장에 이르는 『수상록』 신판을 간행했다. 『수상록』은 1676~1854년 성서를 인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티칸 금서 목록에 올랐으나 몽테뉴는 평생 온건한 가톨릭 신자였다. 1592년 59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