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루카치는 윤리학에 대한 저술 구상에 준해서 윤리학적 저술에 착수하기는 했으나, 그 저술의 첫 장에 대한 논의가 길어지면서 그것을 따로 독립된 저작으로 발표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이다. 늙고 병든 루카치는 이 저작의 출간을 학수고대하면서 남은 힘을 다 쏟아부어서 저술을 재촉했지만, 안타깝게도 미처 원고를 다 완성하지 못한 채 1971년 6월 4일 눈을 감았다. 늙음, 병마 등과 싸우면서 애초에 예상한 것보다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심지어 구술의 방식으로까지 작성한 늙은 루카치의 고투(苦鬪)는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숭고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유고로 남은 이 마지막 저서는 그 분량이 실로 상상 밖이다. 벤젤러(F. Benseler)의 편집으로 독일 루흐터한트(Luchterhand)에서 1984년에 출간된 지금의 판본 Prolegomena Zur Ontologie des gesellschaftlichen Seins는 두 권으로 나왔는데, 그 독일어 판본의 제1권과 2권은 각각 무려 692쪽과 767쪽이나 된다.
루카치가 볼 때, 신실증주의와 실존주의는 현대 철학의 지형에서 적대적 진영을 구축할망정,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심지어 이 두 적대적 진영은 상대방의 단점을 서로 보완해주기도 한다. 이 두 진영이 겉보기의 적대성을 뒤로하고 공통점을 공유하고 상호 보완의 우정을 나누는 것은 공히 사회적 현실과 인간적 삶에 대한 자본주의적 조작을 출발점으로 삼는 까닭이다. 하르트만은 하이데거와 동시대의 독일 철학자이지만, 하이데거와는 다른 존재론의 길을 갔다. 그는 자연 존재를 배제하고 인간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존재론적 분석에 몰두한 하이데거와 달리 일상에서 과학을 거쳐서 자연 존재론으로 건너갔다. 루카치는 무엇보다도 현실의 즉자성을 놓치고 자본주의적 조작에 가담한 신실증주의와 현상학적 실존주의에 맞서서 자연 존재의 즉자성을 존중한 하르트만의 자연 존재론을 높게 평가한다. 그것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존재론적 사유의 나침반으로 삼고자 하는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에 가장 적합한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Contents
제1부 현재의 문제 상황
서론
제1장 신실증주의와 실존주의
1. 신실증주의
2.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여론(餘論)
3. 실존주의
4. 현재의 철학과 종교적 욕구
제2장 참된 존재론을 향한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진격
1. 하르트만의 존재론의 구축원리들
2. 하르트만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
Author
게오르그 루카치,권순홍
1885년 4월 1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루카치는,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언어와 폭넓은 사유를 이 세상에 남겼다. 약관을 갓 넘은 나이에 집필하기 시작한 글들로 구성된 『영혼과 형식』으로 현대 실존주의의 원형을 제시한 그는, 몇 년 뒤 발표한 『소설의 이론』을 통해서는 형식과 역사의 내적 연관성을 중시하는 소설론 계보의 초석을 놓았다. 그가 혁명적 공산주의자로 삶의 양식과 세계관을 통째로 바꾼 뒤 본격적으로 매진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정치적 실천 경험이 바탕에 놓인 『역사와 계급의식』은, 그에게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라는 위명을 부여했다. 1920년대 말 헝가리 공산당 내 분파투쟁에서 패한 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이론적·비평적 작업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삶을 살아나갔다. 1930~40년대에 그는 “위대한 리얼리즘”에 대한 요구로 수렴되는 문학담론과 『청년 헤겔』, 『이성의 파괴』 등의 집필을 통해 명시적으로는 파시즘 및 그것으로 귀결되는 서구의 비합리주의 전통에 맞서면서, 은밀하게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루카치는 스탈린주의와의 근본적 단절과 마르크스주의의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걸고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이론적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따른 성과는 미학에서 『미적인 것의 고유성』과 『미학의 범주로서의 특수성』으로, 철학에서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을 위하여』와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을 위한 프롤레고메나』로 묶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정치적 제안인 『사회주의와 민주화』와 문학비평인 『솔제니친』이 태어났다. 그의 “삶으로서의 사유”, “사유로서의 삶”은 1971년 6월 4일, 그의 죽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885년 4월 1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루카치는,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언어와 폭넓은 사유를 이 세상에 남겼다. 약관을 갓 넘은 나이에 집필하기 시작한 글들로 구성된 『영혼과 형식』으로 현대 실존주의의 원형을 제시한 그는, 몇 년 뒤 발표한 『소설의 이론』을 통해서는 형식과 역사의 내적 연관성을 중시하는 소설론 계보의 초석을 놓았다. 그가 혁명적 공산주의자로 삶의 양식과 세계관을 통째로 바꾼 뒤 본격적으로 매진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정치적 실천 경험이 바탕에 놓인 『역사와 계급의식』은, 그에게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라는 위명을 부여했다. 1920년대 말 헝가리 공산당 내 분파투쟁에서 패한 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이론적·비평적 작업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삶을 살아나갔다. 1930~40년대에 그는 “위대한 리얼리즘”에 대한 요구로 수렴되는 문학담론과 『청년 헤겔』, 『이성의 파괴』 등의 집필을 통해 명시적으로는 파시즘 및 그것으로 귀결되는 서구의 비합리주의 전통에 맞서면서, 은밀하게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루카치는 스탈린주의와의 근본적 단절과 마르크스주의의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걸고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이론적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따른 성과는 미학에서 『미적인 것의 고유성』과 『미학의 범주로서의 특수성』으로, 철학에서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을 위하여』와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을 위한 프롤레고메나』로 묶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정치적 제안인 『사회주의와 민주화』와 문학비평인 『솔제니친』이 태어났다. 그의 “삶으로서의 사유”, “사유로서의 삶”은 1971년 6월 4일, 그의 죽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