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지성이 극찬한 발터 벤야민의『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혹은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이 13년 동안 전념해온 미완의 역작이다. 벤야민의 이론적 고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진 몇 가지 단편적인 개념들을 포함해 벤야민의 전체적인 사유의 작업장으로서 마르크스의『자본』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광대하고도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아케이드, 신유행품점, 패션, 권태, 광고, 수집, 미래의 꿈, 산책자, 매춘, 도박, 거리들, 영화, 사진 등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 현실에서는 매 분초마다 우리 눈 앞에 나타나지만 막상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지 않은 현상들을 벤야민은 벌써 60년 전에, 그것도 19세의 파리로, 자본주의의 탄생지로, 자본주의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근원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Contents
한국어판 옮긴이 서문
:“아아, 이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다시 조립할 수 있다면”
일본어판 안내글 벤야민이 걸어온 길
: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
용어 해제
편집자 서문
개요들
파리 ― 19세기의 수도(1935년 개요)
파리 ― 19세기의 수도(1939년 개요)
노트와 자료들
A 아케이드, 신유행품점, 신유행품점 점원
B 패션
C 태고의 파리, 카타콤베, 폐허, 파리의 몰락
D 권태, 영겁회귀
E 오스만식 도시 개조, 바리케이드전
F 철골 건축
G 박람회, 광고, 그랑빌
H 수집가
I 실내, 흔적
J 보들레르
K 꿈의 도시와 꿈의 집, 미래의 꿈들, 인간학적 허무주의, 융
L 꿈의 집, 박물관, 분수가 있는 홀
M 산책자
N 인식론에 관해, 진보 이론
O 매춘, 도박
P 파리의 거리들
Author
발터 벤야민,조형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프라이부르크, 뮌헨 대학 등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나중에 평생의 친구이자 유대사상에서 지적 동반자가 된 게르숌 숄렘을 만난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간 그는 1919년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에 대한 연구로 베른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고 번역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4년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집필하지만 아카데미 세계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같은 해에 알게 된 연인 아샤 라치스 이외에 나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유물론적 사유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평, 번역, 방송활동을 펼쳐나간다.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유럽에서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로 이해한 그가 택한 길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고, 유대 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 신비주의와 계몽적 사유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통해 현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1940년 벤야민은 당시 뉴욕에서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원을 받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를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결한다. 그로써 그가 13년간 매달렸던 프로젝트, 즉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의 구상을 상부구조(문화) 전체에 적용하여 19세기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필생의 저작 『파사젠베르크』(Das Passagen-Werk)는 미완으로 남는다. 스탈린-히틀러의 밀약을 접한 충격에서 쓴 유물론적 역사철학의 결정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일명 ‘역사철학테제’)는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프라이부르크, 뮌헨 대학 등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나중에 평생의 친구이자 유대사상에서 지적 동반자가 된 게르숌 숄렘을 만난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간 그는 1919년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에 대한 연구로 베른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고 번역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4년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집필하지만 아카데미 세계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같은 해에 알게 된 연인 아샤 라치스 이외에 나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유물론적 사유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평, 번역, 방송활동을 펼쳐나간다.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유럽에서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로 이해한 그가 택한 길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고, 유대 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 신비주의와 계몽적 사유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통해 현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1940년 벤야민은 당시 뉴욕에서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원을 받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를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결한다. 그로써 그가 13년간 매달렸던 프로젝트, 즉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의 구상을 상부구조(문화) 전체에 적용하여 19세기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필생의 저작 『파사젠베르크』(Das Passagen-Werk)는 미완으로 남는다. 스탈린-히틀러의 밀약을 접한 충격에서 쓴 유물론적 역사철학의 결정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일명 ‘역사철학테제’)는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