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棨, 1607-1664)의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유계는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윤선거(尹宣擧)ㆍ이유태(李惟泰)와 함께 충청(忠淸) 산림(山林)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진다.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변화가 발생했던 시기이며, 사회경제 방면의 여러 정책과 예론에 대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충돌했던 때이다. 유계는 이 시기에 현실지향적인 측면에서 사회 모순을 개선하며 학문적으로 오랜 기간 자신이 축적한 경세론과 사회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방향을 모색하였다. 또한 역사와 경전 및 예설(禮說)에 조예가 있어 우리나라의 역사와 선현의 예설 등을 참고하여 《여사제강(麗史提綱)》ㆍ《가례원류(家禮原流)》를 편찬하였다. 주자(朱子)의 경전 및 《가례(家禮)》를 바탕으로 평생 경학과 예학에 몰두하고 정리하는 일에 힘쓰고 많은 저작을 남겼다. 아울러 유계의 《시남집》에는 예학과 경세학, 사학 및 문학에 걸쳐 괄목할 만한 글이 남아 있는데 그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시남집》에는 그가 추구한 사회개혁 정책과 관련한 상소문과 예론, 경세론 등 유계의 학문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적지 않은 글이 실려 있다.
《시남집》은 원집(原集) 24권, 부록(附錄) 3권 합 11책과 별집(別集) 9권, 부록(附錄) 합 4책으로 총 15책이다. 서문은 송시열이 썼고 윤증(尹拯)이 발문을 썼으며, 별집 말미에는 유노환(兪魯煥)의 별집 발문이 실려 있다.
17세기 중후반 조선은 양란(兩亂) 이전부터 내려오던 폐단과 양란의 영향으로 나라의 재정과 백성의 삶이 더욱 피폐한 상태였다. 유계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대 시대적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이 요구되던 때였고,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유계의 문집에는 경세사상과 민생에 대한 사회 정책 등의 고민이 여실이 담겨 있다.
Contents
일러두기
시남집 제16권
잡저雜著
독서쇄설 260조 讀書?說 二百六十條
시남집 제17권
잡저雜著
강거문답 江居問答
시남집 제18권
서序
목계로 가는 신군필을 전송하는 서문 기묘년 送申君弼之木溪序 己卯
기계 유씨 족보 서문 杞溪兪氏族譜序
화순 홍대이가 소명을 받고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 무자년 送洪和順大而承召北歸序 戊子
생질 윤후로를 전송하는 서문 送尹甥後老序
《당시유선》 서문 唐詩類選序
《간양록》 서문 看羊錄序
시남집 제19권
1607(선조40)~1664(현종5). 조선 중기의 인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1630년(인조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 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임천(林川)에 유배되었다.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錦山)의 마하산(麻霞山)에 산천재(山泉齋)를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6년 무안 현감이 되었다. 1649년 인조 사후에 인조의 묘호를 정하는 일에 반대하여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로 효종의 노여움을 사 1650년(효종1)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영월(寧越)로 이배되었다. 1652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대사성·부제학·대사헌·이조 참판·도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시남집(市南集)》, 《가례원류(家禮源流)》, 《여사제강(麗史提綱)》이 전한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와 더불어 충청 오현(忠淸五賢)으로 일컬어졌다.
1607(선조40)~1664(현종5). 조선 중기의 인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1630년(인조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 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임천(林川)에 유배되었다.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錦山)의 마하산(麻霞山)에 산천재(山泉齋)를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6년 무안 현감이 되었다. 1649년 인조 사후에 인조의 묘호를 정하는 일에 반대하여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로 효종의 노여움을 사 1650년(효종1)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영월(寧越)로 이배되었다. 1652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대사성·부제학·대사헌·이조 참판·도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시남집(市南集)》, 《가례원류(家禮源流)》, 《여사제강(麗史提綱)》이 전한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와 더불어 충청 오현(忠淸五賢)으로 일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