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선생 한씨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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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5/01
Pages/Weight/Size 190*260*20mm
ISBN 9791168876835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조선후기 유학자 한원진이 부녀자가 힘써야 할 덕목과 범절에 대하여 저술한 교훈서. 여훈서

남당선생한씨부훈(南塘先生韓氏婦訓)은 1712년(숙종 38)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31세 때에 부녀자에게 교훈이 될 만한 것을 정리한 내용으로, 1874년(고종 11)에 필사한 것이다.

한원진은 평소 심술(心術)의 폐단을 바로잡고 권면(勸勉)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한 집안의 아녀자의 교훈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마침 사매(舍妹)인 이씨부인(李氏婦人)이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써서 가르쳐 달라고 하여 지었다고 한다. 발문에서 김평묵(金平默)은 이 책이 규방(閨房)의 경(經)으로서 어려서 어머니가 언해본을 읽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것이 『남당집(南塘集)』의 내용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으니 친구 신성담(申聖澹)이 정역(精譯)하여 그 뜻을 다하길 바란다고 당부하였다.

궤인(軌印)이 있는 필사본으로 1책(17장)으로 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 한원진의 서문과 1874년(고종 11) 김평묵(金平默)의 발문을 붙여 필사하였다. 한원진의 문집 『남당집』권26에도 전한다.

모두 11장으로 (1) 총설장(總說章) (2) 사부모구고장(事父母舅姑章) (3) 사가장장(事家長章) (4) 접형제제사장(接兄弟??章) (5) 교자부장(敎子婦章) (6) 대첩잉장(待妾?章) (7) 어비복장(御婢僕章) (8) 간가무장(幹家務章) (9) 접빈객장(接賓客章) (10) 봉제사장(奉祭祀章) (11) 근부덕장(謹婦德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에 맞추어 실천규범을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집안의 성쇠는 부인의 행실에 달려 있고, 부인의 행실의 옳고 그름은 교육에 있다고 전제하면서 사친(事親)과 봉선(奉先)이 만사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강조하였다.

송시열의 『계녀서(戒女書)』와 송요화(宋堯和)의 아내인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가 지은 『자경편(自警篇)』과 함께 충청권에서 저술된 여성 규훈서로서 조선후기 성리학적 여성 규범과 가정 안에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울러 18세기 후반에 저술된 이덕무(1741∼1793)의 『사소절(士小節)』「부의(婦儀)」편과 비교하면 시기적 차이와 경향(京鄕)의 지역적 차이에 따른 여성규범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Author
한원진
조선 후기에, 『남당집』, 『주자언론동이고』 등을 저술하였으며, 호락논쟁에서 호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는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되어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律呂)·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조선 후기에, 『남당집』, 『주자언론동이고』 등을 저술하였으며, 호락논쟁에서 호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는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되어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律呂)·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