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서고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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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5/01
Pages/Weight/Size 190*260*35mm
ISBN 9791168876859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우리나라의 음악이론·성률(聲律)·악기 등의 기록을 고증한 악서

12권 3책. 사본. 출판연대는 미상이며, 저자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전하고 있다.

이 악서는 악지(樂志)·성률 제작, 이동(異同)·연혁·오류(誤謬) 등에 대하여 고문헌을 인용하여 고증하였고, 편종(編鐘)·편경(編磬)·금(琴)·슬(瑟)·생(笙)·적(笛) 등 악기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 서술한 음악이론서이다.

권1에 논육율여오율부동(論六律與五律不同) 등을, 권2에 논십이율지명의(論十二律之名義) 및 변취율불가이정오음(辨吹律不可以正五音) 등을, 권3에 변십이율불가이배월기(辨十二律不可以配月氣) 및 변삼분손익상하상생지법시어오성방어관자(辨三分損益上下相生之法始於五聲昉於管子) 등을, 권4에 변십이율격팔상생지설여상생하생지설불합(辨十二律隔八上生之說與上生下生之說不合) 등을, 권5에 변사청위오성지청불가위십이율지청성(辨四淸爲五聲之淸不可爲十二律之淸聲) 등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권6에 박십이율관위개구분(駁十二律管圍皆九分) 및 박이변사청병용지법(駁二變四淸竝用之法) 등을, 권7에 사율유삼기(査律有三記) 및 사오성각차이구(査五聲各差以九) 등을, 권8에 사십이율종지제(査十二律鐘之制)를, 권9에 사십이편종지제(査十二編鐘之制)·사십이경지제(査十二磬之制)·사십이훈지제(査十二塤之制)·사십이고지제(査十二鼓之制), 권10은 사십이금슬지제(査十二琴瑟之制), 권11에 사십이생지제(査十二笙之制) 등을, 권12에 정오성지별불과호사죽금석(訂五聲之別不過乎絲竹金石) 및 무의(舞義)·납언의(納言義) 등을 수록되고 있다.

즉, 주로 12율(律)·7성(聲)·8음(音)에 관한 기왕의 설을 논박하고 사정(査訂:조사하여 바로잡음.)한 이론서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Author
정약용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