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에 대한 최초의 전문 해설은 『韓非子』의 「解老」와 「喩老」편에 보인다. 그 후 漢初의 河上公과 魏晉시기 王弼의 『노자』 주석이 이루어지면서 『노자』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이전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즉, “왕필은 단지 24세까지 살았으니, 『老子』에 주석을 하였을 때 字句의 의미에 근거하여 이성적 추론을 전개하였지만, 자신이 수신 공부의 체험이 없었기에 문맥 속에 담겨있는 수신경지의 의미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하상공은 다르다. 그는 수신 공부를 통해 체험한 내용에 근거하여 『老子』를 이해하고 주석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老子』의 내용은 老子 자신의 수신 공부의 체험에 근거한 사상체계라 할 수 있다. 단지 후대에 주석을 할 때, 주석가들이 수신 공부의 체험이 있으나 없느냐에 따라 그 주석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이다.”(「修身과 老子解釋」, 中國文學, 第62輯, 37쪽) 이처럼 『老子』라는 책이 그 해석의 폭이 다양하고 넓은 이유는, 포괄하는 내용이 인간의 사유 범위뿐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근원의 세계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老子』에 대한 해석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판단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해석은 다 道의 한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是非의 분별이 아니라, 분별 이전의 道의 지점은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으로 생졸년은 모두 미상이다. 춘추시대 말엽 초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주나라에서 오늘날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에 해당하는 수장실守藏室 사관을 지냈다. 이후 주나라가 쇠락하자 벼슬을 버리고 떠나던 중, 노자의 비범함을 알아본 함곡관 수문장 윤희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자』를 썼다. 『노자』는 상·하편 5,000여 자의 짧은 분량이지만 우주론, 인생철학, 정치·군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아 후대에 널리 영향을 끼쳤다. 노자가 도를 닦으며 심신을 보양한 삶을 산 덕에 장수했다고 전해질 뿐, 그 외 은둔 길에 오른 이후의 종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으로 생졸년은 모두 미상이다. 춘추시대 말엽 초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주나라에서 오늘날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에 해당하는 수장실守藏室 사관을 지냈다. 이후 주나라가 쇠락하자 벼슬을 버리고 떠나던 중, 노자의 비범함을 알아본 함곡관 수문장 윤희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자』를 썼다. 『노자』는 상·하편 5,000여 자의 짧은 분량이지만 우주론, 인생철학, 정치·군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아 후대에 널리 영향을 끼쳤다. 노자가 도를 닦으며 심신을 보양한 삶을 산 덕에 장수했다고 전해질 뿐, 그 외 은둔 길에 오른 이후의 종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