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서문예신보 泰西文藝新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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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4/01/30
Pages/Weight/Size 265*370*20mm
ISBN 9791168876194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1918년 9월에, 김억, 이일, 장두철 등이 중심이 되어 서구 문예 소개를 위해 창간한 주간 문예 잡지.

B4판. 8면.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로 1918년 9월 창간되어 1919년 2월 16호로 종간되었다. 주간은 장두철(張斗澈)로 발간 당시에는 종합지의 성격을 띠고 문예작품 외에도 취미기사를 실었으나 그 뒤 곧 문예지의 성격을 띠었다.

주요 내용은 창작시 · 번역시 · 창작소설 · 번안소설 · 외국문학과 문단 사정의 소개, 시론(詩論) 등으로 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시와 해외 시의 수입 · 소개를 겸한 이론들이다. “본보는 저 태서(서양)의 유명한 소설 · 사조 · 산문 · 가곡 · 음악 · 미술 · 각본 등 일반문예에 관한 기사를 문학 대가의 붓으로 직접 본문으로부터 충실하게 번역하여 발행”할 것이라고 밝힌 창간호의 권두언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김억(金億) · 이일(李一) · 장두철 등이 중심이 되어 서구문예의 도입 소개에 주력하였다.

1919년 2월 16일까지 약 5개월(21주) 동안 16호를 내고 있으니, 매주 정기적으로 발행되지는 못한 셈이지만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서는 좋은 성적이라 할 수 있다. 편집 · 발행자들의 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매호 권두에는 사설(社說, 에디토리얼)을 싣고 있으며 음악 · 미술까지도 포함한 예술 전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학 중심으로 편집되었다.

특히 시를 제외한 다른 장르는 별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준시전문지(準詩專門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김억의 번역시와 시론은 한국 근대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으며 이 번역시들은 뒷날 한국 최초의 시집인 『오뇌의 무도』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과거 『소년』 · 『청춘』을 통하여 발표된 최남선(崔南善)이나 이광수(李光洙)의 시가 포에지(poesie, 시정신(詩精神))를 결여한 채 형태만의 새로움을 내세웠다면, 『태서문예신보』에 실린 김억 · 황석우(黃錫禹)의 창작 시편들은 개성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한 개성적인 운율의 창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를 근대문학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번역시와 외국 시론의 소개와 함께 총 38편의 창작 시를 싣고 있는 이 문예지는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한국 근대문학의 개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Author
김억,이일
1896년 본관 경주, 음력 10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섭리 1798번지에서 아버지 김기범金基範과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서는 이곳에서 10대의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고 전한다. 본명은 희권熙權인데 후에 ‘억億’으로 개명, 아호는 안서岸曙.

1910년대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창조(創造)], [폐허(廢墟)], [영대(靈臺)],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역시(譯詩)·평론·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연구에서도 선편(先鞭)을 잡고 그 보급을 위하여 강습소를 열기도 하였으며, 『개벽』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연재하여, 뒤에 간행된 『에스페란토 단기강좌(Esperanto Kurso Ramida)』라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가 되었다.

또한, 김소월(金素月)의 스승으로서 김소월을 민요시인으로 길러냈고, 자신도 뒤에 민요조의 시를 주로 많이 썼다. 김억은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한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저서로는 『기탄자리』, 『해파리의 노래』, 『오뇌의 무도』(개정판), 『신월』, 『잃어진 진주』, 『원정』, 『금모래』, 『봄의 노래』, 『안서시집』, 『사상만필』, 『모범서한문』, 『망우초』, 『소월시초』, 『안서시초』, 『동심초』, 『꽃다발』, 『지나명시선 백낙천집』, 『애국백인일수』, (일본단가 번역), 『야광주』, 『먼동이 틀 제』, 『금잔디』, 『민요시집』, 『옥잠화』 등이 있다.
1896년 본관 경주, 음력 10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섭리 1798번지에서 아버지 김기범金基範과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서는 이곳에서 10대의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고 전한다. 본명은 희권熙權인데 후에 ‘억億’으로 개명, 아호는 안서岸曙.

1910년대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창조(創造)], [폐허(廢墟)], [영대(靈臺)],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역시(譯詩)·평론·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연구에서도 선편(先鞭)을 잡고 그 보급을 위하여 강습소를 열기도 하였으며, 『개벽』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연재하여, 뒤에 간행된 『에스페란토 단기강좌(Esperanto Kurso Ramida)』라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가 되었다.

또한, 김소월(金素月)의 스승으로서 김소월을 민요시인으로 길러냈고, 자신도 뒤에 민요조의 시를 주로 많이 썼다. 김억은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한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저서로는 『기탄자리』, 『해파리의 노래』, 『오뇌의 무도』(개정판), 『신월』, 『잃어진 진주』, 『원정』, 『금모래』, 『봄의 노래』, 『안서시집』, 『사상만필』, 『모범서한문』, 『망우초』, 『소월시초』, 『안서시초』, 『동심초』, 『꽃다발』, 『지나명시선 백낙천집』, 『애국백인일수』, (일본단가 번역), 『야광주』, 『먼동이 틀 제』, 『금잔디』, 『민요시집』, 『옥잠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