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거리와 골목을 배회하고,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과 내가 말할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내가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먹고, 내가 느껴보지 못한 빛과 향을 느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일 것들이 내게는 희미한 몽상이다." ('아바나'에서)
『줌 아웃』은 현직 변호사인 작가가 지난 5년여 동안 틈틈이 써온 초단편 소설 65편을 묶어낸 책이다. 저자는 일상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소재를 어느 때는 순식간에, 또 어느 때는 시간을 두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구체화하며 곁에 붙잡아 두었다. 이러한 작업은 작품 속 다양한 화자들의 목소리에서 드러나며 작가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구성되는지 짐작하게 한다.
예순 다섯 개 이야기 속 예순 다섯 명 화자는 우리가 매일같이 오가는 길 위에서 축적된 시간을 들추어내기도, 폐허가 된 공간에서 갖가지 배경을 상상해내기도 한다. 이는 만들어낸 허구적 시공간이 아니라 도시 속을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이 늘 경험하는 시공간이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곳에 와서 남아돌고 느려진 시간 탓에 내 상상과 생각이 바다 물결을 타고 이리저리 넘실댈 뿐이었다. 나는 어느 어스름 한 저녁 시간에 손전등을 들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벽지, 돌과 흙, 쥐, 벽과 바닥 틈으로 자라난 풀, 거미줄, 그리고 구석에는 유리에 금이 가고 깨진 액자 속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