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한용운 채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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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5/25
Pages/Weight/Size 138*198*23mm
ISBN 9791198202420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수신과 처세를 위한 우리 시대 최고의 철학!
“깨끗한 거울과 잔잔한 호수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다스리면 행복과 사랑이 넘치지만,
마음을 흙탕물처럼 더럽히면 미움만 가득해진다.”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작은 종지는 비를 받을 수 없듯이
아무리 많은 복을 줘도 마음 그릇이 작으면 받을 수 없다.
나의 마음 그릇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

흔들리는 마흔에 깨닫는 가장 쉽고 명확한 인생의 답을
마흔에 읽는 『한용운 채근담』으로 만나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고달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용기와 지혜를 심어주기 위해 만해 한용운 선사가 중국의《채근담》을 당시 조선인의 실정에 맞게 편역한《채근담 정선 강의》를 한학에 능통한 용화 선지식이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옮기고 해설한 책이다.

평소 한용운 스님은 조선의 신문학과 신문화운동에 공헌한 [신문관]에 주석하면서 조선인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책들을 많이 펴내었는데 『채근담 정선 강의』도 그중의 하나다. 문장마다 주옥같은 가르침이 들어 있는 것은 물론, 편 편마다 향기가 나는 내용들로 가득해 백담사 조실이자 시인이었던 무산 오현 스님조차 애지중지했던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채근담』은 명나라 만력제 연간의 문인이며 상인 가문 출신이었던 홍자성이 험난한 인생의 여정을 겪고 난 뒤, 후세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일러주기 위해 쓴 책으로서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수신(修身)과 처세’의 기본이며 영원한 고전이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책은 명나라 때 홍자성이 쓴 것과 청나라 때 홍웅명이 쓴 것이 있으나 일각에서는 두 사람이 똑같은 인물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분명치 않다.

‘채근(採根)’은 ‘나무뿌리’를 가리키고 ‘담(譚)’은 이야기로서 풀뿌리를 씹듯이 되씹어 음미해야 할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소학(小學)』에 인용된 송나라 때의 왕신민은 “사람이 항상 나무뿌리를 씹어 먹고 사는 것처럼 인생을 견디고 살면, 곧 백 가지의 일도 능히 이룬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거친 인생의 역경을 이기면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이다. 마흔에 읽는『한용운 채근담』은 자칫 흔들리기 쉬운 인생의 전환점인 마흔에 지혜의 그릇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을 줄 책임이 분명하다.
Contents
머리말│나를 가꾸는데 필요한 불멸의 고전 · 5

제1부 마음의 그릇

참된 청렴이란 · 16 복을 받으려면 복을 지어라 · 18 온화한 성품을 가져라 · 20 지나간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 22 인생은 후반부가 중요하다 · 24 만족이 넘칠 때 조심하라 · 26 처음과 끝이 똑같이 행동하라 · 28 남의 능력을 시기하지 말라 · 30 남의 단점을 다른 이에게 말하지 말라 · 32 화를 잘 내는 사람 앞에서는 침묵하라 · 34 일할 때는 긴장을 풀어라 · 36 공과(功過)를 잘 분별하라 · 38 악(惡)은 드러내고 선(善)은 숨겨라 · 40 덕을 쌓아라 · 42 남 탓하지 마라 · 44덕(德)은 사업의 바탕이다 · 46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용서하지 말라 · 48 엄격함과 너그러움을 함께 가져라 · 50 오직 참을 내(耐) 자만을 생각하라 · 52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할 두 가지의 말 · 54 풍족할 때 검소하라 · 56

제2부 마음의 거울

탐욕은 처음부터 제거하라 · 60 마음을 웅혼한 침묵에 두라 · 62 한가할 때 마음을 점검하라 · 64 젊을 때 뜻을 세우라 · 66 성정(性情)을 잘 다스려라 · 68 잡념에 빠지지 마라 · 70 백절불굴의 참마음을 갖고 있으라 · 72 일의 이치를 스스로 깨우쳐라 · 74 몸과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하라 · 76 타인을 진실하게 대하라 · 78 분별심을 버려라 · 80 욕심은 버리고 순리에 순응하라 · 82 참된 용기란 · 84 사람을 신중하게 사귀라 · 86 헛된 욕망을 가지지 말라 · 88 세상사에 초연하라 · 90 원망을 사지 말라 · 92 마음을 여유롭게 유지하라 · 94 불의를 보고 용서하지 말라 · 96 마음부터 먼저 항복시켜라 · 98

제3부 만물의 이치

일은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처리하라 · 102 덕을 베풀어라 · 104 노 젓는 것을 멈추지 마라 · 106 진솔한 마음을 가져라 · 108 시류를 따르지 말라 · 110 과감함과 신중함을 함께 가져라 · 112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 114 군자의 참모습 · 116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 118 관대한 마음을 가져라 · 120 베푸는 마음을 지녀라 · 122 근기에 맞게 가르쳐라 · 124 밝음은 어둠에서 온다 · 126 총명함을 애써 드러내지 말라 · 128 티끌조차도 욕망에 다가가지 마라 · 130 진리에 뜻을 두고 공부하라 · 132 죄짓지 마라 · 134 은혜는 잊지 말고 원한은 빨리 잊으라 · 136 검소하게 살라 · 138 몸과 마음을 밝게 유지하라 · 140 선행(善行)은 몰래 베풀어라 · 142 일이 힘들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라 · 144

제4부 공(空)의 이치

공사를 잘 구분하고 신념을 가져라 · 148 군자와 소인배의 차이 · 150 편안함만을 추구하지 말라 · 152 함부로 벗을 사귀지 말라 · 154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라 · 156 마음을 비우고 자유자재하라 · 158 어떤 일도 마무리가 가장 중요하다 · 160 한 생각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 162 도(道)는 천기(天機)에 달려 있다 · 164 참된 성품을 구하는 법 · 166 세 가지 덕목을 실천하라 · 168 기꺼이 사람을 포용하라 · 170 세상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라 · 172 사람을 믿는 것은 곧 나를 믿는 것이다 · 174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잘 분석하라 · 176 남을 절대로 헐뜯지 말라 · 178 입은 마음의 문이다 · 180 세상을 등지고 수행하지 마라 · 182

제5부 마음의 본체

군자의 도리 · 186 마음의 본체를 느껴라 · 188 혼자만 바쁘게 살지 마라 · 190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 192 마음을 비워라 · 194 관 속의 자기를 생각하라 · 196 이치를 깨쳐라 · 198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 200 자기 분수에 맞게 살라 · 202 기개와 절개를 잘 다스려라 · 204 스스로 함정에 빠지지 말라 · 206 일이 잘 풀릴 때일수록 어려움에 닥칠 때를 대비하라 · 208원인 없는 일은 없다 · 210 바쁘게 살지 말라 · 212 소식(小食)을 실천하라 · 214 한가할 때 조심하라 · 216 원만하고 관대하라 · 218 우주는 영원하다 · 220 욕정을 잘 다스려라 · 222 명예와 재물을 탐하지 말라 · 224 집착을 내려놓아라 · 226

제6부 평상심(平常心)이곧 도(道)다

강한 사람이 되라 · 230 지나친 애증을 갖지 말라 · 232 신념을 가져라 · 234 벗을 사귈 때는 신중하라 · 236 외부 환경에 쉽게 마음이 흔들리지 마라 · 238 화를 복으로 바꾸는 지혜 · 240 자만심을 버려라 · 242 진실한 마음을 가져라 · 244 사람의 감정은 창이고 인식은 칼이다 · 246 잘못된 한 생각이 모든 잘못의 원인이다 · 248 죽음을 안다면 화날 일이 하나도 없다 · 250 자신을 꾸미지 말라 · 252 재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 254 세상을 내 손안에 담아라 · 256 인생의 독약 · 258 평범함이 곧‘도(道)’다 · 260 홀로 있을 때 자기를 잘 관조하라 · 262
Author
한용운,용화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