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망명 후 조선의 독립운동에 힘쓴 아버지 김철남과 중국 장시성 난창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늘 탄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싸우시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네 명의 동생들을 돌보았다. 고등학생이던 1945년 광복 당시 애국지사 아버지의 지시로 연설대회에 참가해 우리의 독립을 알리고 조선과 중국이 힘을 합치자는 내용을 발표해 학우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46년 국립중앙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한 뒤 음악학과로 편입했고, 1950년 일을 시작하여 중앙가극원의 지휘자 겸 작곡가, 중국영화악단의 지휘자 겸 예술위원회 주임,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 ‘아리랑 필하모닉 악단’을 결성하고, 1992년 아버지를 대신해 한국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3년 다시 한 번 한국에 초청되어, KBS 교향악단과 함께 순국선열을 위해 직접 쓴 《제1교향곡》을 연주했다.
그는 수많은 오페라, 무용극, 교향곡, 합창을 지휘한 1급 지휘자로, 다수의 영화 및 드라마 음악을 작곡, 녹음하기도 했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망명 후 조선의 독립운동에 힘쓴 아버지 김철남과 중국 장시성 난창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늘 탄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싸우시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네 명의 동생들을 돌보았다. 고등학생이던 1945년 광복 당시 애국지사 아버지의 지시로 연설대회에 참가해 우리의 독립을 알리고 조선과 중국이 힘을 합치자는 내용을 발표해 학우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46년 국립중앙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한 뒤 음악학과로 편입했고, 1950년 일을 시작하여 중앙가극원의 지휘자 겸 작곡가, 중국영화악단의 지휘자 겸 예술위원회 주임,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 ‘아리랑 필하모닉 악단’을 결성하고, 1992년 아버지를 대신해 한국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3년 다시 한 번 한국에 초청되어, KBS 교향악단과 함께 순국선열을 위해 직접 쓴 《제1교향곡》을 연주했다.
그는 수많은 오페라, 무용극, 교향곡, 합창을 지휘한 1급 지휘자로, 다수의 영화 및 드라마 음악을 작곡, 녹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