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랑 사랑이야 (큰글자책)

판으로 열고 소리로 그리는 춘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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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4/07/11
Pages/Weight/Size 210*290*20mm
ISBN 9791193946176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춘향가〉는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여섯 마당 가운데 가장 인기 있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나다. 인간의 영원한 관심의 대상인 청춘 남녀의 사랑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신분의 차이로 인한 갈등, 선과 악의 대립, 당대의 사회적인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Contents
들어가는 글

1막_도화와 이화가 만나

광한루에 올라서서
그네 타는 춘향
춘향의 내력
어여쁘고 어여쁘니
재녀로다 미녀로다

2막_사랑 사랑 사랑이야

춘향이네 집치레
장모 잔속 장히 안다
사랑 사랑 사랑이야
갑작스러운 이별 소식에
날 본 듯이 열어 보라

3막_수청 들란 말 아니 듣소

신관 사또의 기생점고
춘향을 불러들이라
수청 들란 말 아니 듣소
곤장 맞는 춘향
꿈에라도 만났으면

4막_ 암행 가는 길

이도령의 어사 제수
우리 고을에 망 들었지
옥중에서 보낸 편지
남원 땅에 풍년 드소
농사철에 장탄가라

5막_꿈에라도 보았으면

춘향 어미의 마음
거지꼴로 돌아와서
간밤의 꿈이런가
옥중에서 다시 만나
이 몸 한을 풀어주오

6막_암행어사 출두야

본관 사또 잔칫날이라
그 상 보고 내 상 보니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암행어사 출두야
좋을씨고 좋을씨고
Author
신재효,조일동
신재효는 본관이 평산(平山)이요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가 동리(桐里)로, 순조 11년(1812) 11월 6일 신광흡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73세 되던 고종 21년(1884) 태어난 날과 같은 11월 6일, 그 삶을 마감하기까지 격동적인 시대 변화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치성을 드려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부모는 나이 들어 얻었으니 효도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재효라고 지었는데, 부모의 이러한 뜻에 어긋나지 않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신재효는 고창현의 이방에 이어 호장까지 오른 뒤 오랜 공무에서 벗어났는데, 치산(治産)의 지혜와 근면성, 성실성을 기반으로 40대 전후에 이미 곡식 1000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은 재산을 쓸 줄 모르는 졸부가 아니었다. 병자년(1876)의 대흉년에는 아끼면서 모은 재산을 굶주린 재해민을 돕는 데 아낌없이 썼다. 또한 자신이 근무하던 관아인 형방청의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돈을 시주했고, 경복궁의 복원 사업에 원납전으로 500냥을 헌납했다. 특히 광대의 양성과 후원에는 전 재산을 기울였다. 그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가선대부의 포상을 받았고,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 희사의 공으로 고종 15년(1878)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이라는 명예직을 받기도 했다.

신재효는 축적된 부와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판소리를 애호하고, 풍류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판소리와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기존의 판소리 사설을 개작해 우리에게 전했다는 점이다. 판소리 열두 작품 중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정리 개작했는데, [춘향가]의 경우는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의 두 가지를 남겨 주었다. 또한 [오섬가]의 창작을 통해 판소리에 ‘옴니버스(omnibus)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그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엮어질 것 같지 않은 춘향의 이야기, 배 비장의 이야기, 그리고 강릉 매화의 이야기 등을 한 주제에 의해 통합함으로써 판소리의 한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허두가], [호남가], [광대가], [치산가]와 같은 많은 가사도 지었다. 신재효가 지은 가사는 그의 기질과 사업, 그리고 지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재효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실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에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 중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판소리 연창자에 대한 지원이 대단히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그는 판소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안목으로 지속적이고도 계획적인 판소리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이 나타남으로써 판소리사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도 했다.
신재효는 본관이 평산(平山)이요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가 동리(桐里)로, 순조 11년(1812) 11월 6일 신광흡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73세 되던 고종 21년(1884) 태어난 날과 같은 11월 6일, 그 삶을 마감하기까지 격동적인 시대 변화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치성을 드려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부모는 나이 들어 얻었으니 효도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재효라고 지었는데, 부모의 이러한 뜻에 어긋나지 않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신재효는 고창현의 이방에 이어 호장까지 오른 뒤 오랜 공무에서 벗어났는데, 치산(治産)의 지혜와 근면성, 성실성을 기반으로 40대 전후에 이미 곡식 1000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은 재산을 쓸 줄 모르는 졸부가 아니었다. 병자년(1876)의 대흉년에는 아끼면서 모은 재산을 굶주린 재해민을 돕는 데 아낌없이 썼다. 또한 자신이 근무하던 관아인 형방청의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돈을 시주했고, 경복궁의 복원 사업에 원납전으로 500냥을 헌납했다. 특히 광대의 양성과 후원에는 전 재산을 기울였다. 그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가선대부의 포상을 받았고,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 희사의 공으로 고종 15년(1878)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이라는 명예직을 받기도 했다.

신재효는 축적된 부와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판소리를 애호하고, 풍류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판소리와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기존의 판소리 사설을 개작해 우리에게 전했다는 점이다. 판소리 열두 작품 중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정리 개작했는데, [춘향가]의 경우는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의 두 가지를 남겨 주었다. 또한 [오섬가]의 창작을 통해 판소리에 ‘옴니버스(omnibus)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그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엮어질 것 같지 않은 춘향의 이야기, 배 비장의 이야기, 그리고 강릉 매화의 이야기 등을 한 주제에 의해 통합함으로써 판소리의 한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허두가], [호남가], [광대가], [치산가]와 같은 많은 가사도 지었다. 신재효가 지은 가사는 그의 기질과 사업, 그리고 지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재효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실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에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 중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판소리 연창자에 대한 지원이 대단히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그는 판소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안목으로 지속적이고도 계획적인 판소리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이 나타남으로써 판소리사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