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태되었던 밤, 나는 거기 없었다.
당신보다 앞서 있는 날을 목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파스칼 키냐르를 사로잡은 매혹,
황홀경을 일으키는 아득한 밤의 그림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2007년 ‘성적인 밤’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을 내놓는다. 가로가 긴, 양장본의 두꺼운 책을 채운 검은 빛깔의 종이 위로는 마치 어둠 속 유령처럼 수많은 그림들이 나타난다. 거의 200개에 달하는 도판은 미켈란젤로, 코레조, 루벤스, 렘브란트, 마그리트, 피카소, 호퍼 등 위대한 서양화가들의 작품부터 신윤복, 우타마로, 석도 등 동양 대가들의 작품까지 동서를 가로지르고 고금을 관통한다. 화법도, 시대도 다른 이 그림들을 묶어주는 것은 에로티시즘이라는 테마. 키냐르는 하나의 장마다 유사한 모티프로 묶이는 그림을 배치하고 다섯 쪽이 넘지 않는 짧은 단상들을 때로는 그림 곁에서, 때로는 그림으로부터 벗어나며 이어간다.
소설 『로마의 테라스』를 통해 회화 장르를, 산문 『섹스와 공포』를 통해 로마의 성(姓) 문화를 탐구한 바 있는 키냐르는 이 책에서 평생 수집한 이 그림들을 섬세히 묶고 또 배치하는데 이 자체가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1장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의 그림은 디도와 아이네이아스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 아이네이아스 앞에 횃불을 밝히고 있는 어린아이를, 그 어린아이의 언어적 불능을 상기한다. 이 어린아이는 차츰차츰 그리스신화 속 신과 영웅들(‘악테온과 다이아나’ ‘마르스와 비너스’ ‘에로스와 프시케’ 등), 성서의 인물들(‘롯과 그의 딸들’ ‘노아와 그의 딸들’ ‘마리아 막달레나’ 등)으로 형상화되며 다양한 성적 욕망을 비추고는 후반부 장 ‘최후의 상’ ‘제4의 밤’에 이르러서는 죽음을 그리며 사라진다.
이들 그림과 동행하는 키냐르의 글은 단순히 그림의 시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 그림이 촉발하는 또다른 이미지를 그려나간다. 예컨대 연인이 각자 얼굴에 베일을 쓰고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마그리트의 [연인들] 도판과 이웃한 키냐르의 글은 이 그림에 대해 별다른 언급도, 설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성차(性差)가 유발하는 절대적인 이해 불가능성에 대해 탐구할 뿐이다(“우리 각자는 다른 성기를 소유함으로써만 유발되는 성적 체위, 육체적 생활, 심리적 태도 등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키냐르의 관심은 에로티시즘 그 너머로 확장된다. 이에 대해서는 ‘잠과 꿈’ ‘골고다’ ‘지옥들’ ‘세계의 기원’ ‘회화의 기원’ 등과 같은 장 제목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키냐르는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론을 전개한다. 키냐르는 프리드리히 그림에서 나타나는 절대적 고독을 호퍼의 그림 속 ‘오브제 없음’과 연관 지으며 이들이 형상화하는 ‘비가시적 세계’의 정체를 탐구한다.
키냐르는 가시적인 것을 만드는 회화 예술의 근원에 비가시적인 것이 있으며, 이 비가시적인 것이 화가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추동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키냐르는 (그 자체로는 볼 수 없는 것인) 어떤 ‘영감’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현대의 화가와 환각을 그대로 동굴에 그리려고 했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을 동일시한다.
가시적인 것 너머의 비가시적인 것, 회화 장르에 접목하는 이 구도를 키냐르는 그대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 적용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에로티시즘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만든 것은 우리 부모의 성교 행위인데 우리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 장면을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내가 수태되었던 밤, 나는 거기 없었다. 당신보다 앞서 있는 날을 목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성적인 밤』은 이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화가에게 그랬듯 이 불능이 모든 인간에게 꺼지지 않는 허기와 욕망을 자아낸다.
키냐르에게 회화라는 예술 장르와 에로티시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성적인 밤』 은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Contents
머리말 ─ 11
디도와 아이네이아스 ─ 25
비가시적 장면 ─ 31
롯과 그의 딸들 ─ 39
노아와 그의 아들들 ─ 47
놀리 메 탄게레 ─ 55
마리 마들렌 ─ 63
닉스와 녹스 ─ 71
잠과 꿈 ─ 81
라스코 ─ 88
골고다 ─ 95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시데리오 ─ 101
지옥들 ─ 109
야수들 ─ 117
사투르누스 ─ 135
관음증 ─ 147
악타이온과 디아나 ─ 161
마르스와 베누스 ─ 167
바우보와 데메테르 ─ 175
프랑스적 장면 ─ 185
중국의 원초적 장면 ─ 195
세계의 기원 ─ 199
회화의 기원 ─ 223
에로스와 프시케 ─ 233
레안드로스와 헤로 ─ 239
최후의 상 ─ 247
제4의 밤 ─ 255
에스토 에스 로 케 아이 ─ 263
도판 목록 ─ 275
옮긴이의 말 ─ 281
Author
파스칼 키냐르,류재화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베레뇌유쉬르아브르(외르)에서 태어나, 1969년에 첫 작품 『말 더듬는 존재』를 출간하였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았던 두 차례의 자폐증과 68혁명의 열기, 실존주의,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한 철학 공부,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에서의 강의 활동, 그리고 20여 년 가까이 계속된 갈리마르 출판사와의 인연 등이 그의 작품 곳곳 독특하고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개월 동안 죽음에 가까운 병마와 싸우면서 저술한 『떠도는 그림자들』로 2002년 콩쿠르 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의 저서로는 『세상의 모든 아침』등이 있다.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베레뇌유쉬르아브르(외르)에서 태어나, 1969년에 첫 작품 『말 더듬는 존재』를 출간하였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았던 두 차례의 자폐증과 68혁명의 열기, 실존주의,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한 철학 공부,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에서의 강의 활동, 그리고 20여 년 가까이 계속된 갈리마르 출판사와의 인연 등이 그의 작품 곳곳 독특하고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개월 동안 죽음에 가까운 병마와 싸우면서 저술한 『떠도는 그림자들』로 2002년 콩쿠르 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의 저서로는 『세상의 모든 아침』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