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산(曹立珊) 신부님은 1913년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록현(東?縣)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924년 베이징의 상의(上議)사범학교에서 수학하신 뒤, 1929년 하북성 안국현(安國縣)에서 뱅상 레브(Vincent Lebbe, 중국명 雷鳴遠) 신부님이 창립한 「요한(耀漢)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 1932년에 첫 서원을 하셨습니다. 선화성(宣化城) 천주교 신학원(神哲學院)에 입학, 철학과 신학을 수학하셨습니다. 1935년 12월 24일 종신 서원을 하시고,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으로, 뇌명원 신부가 야전구호부대를 조직하자 그 일원으로 참전하시어 최전선[太行山과 中條山]까지 가서 부상병들을 구호하는데 투신하셨습니다. 뇌명원 신부님이 단장을 맡으시고, 조신부님은 사무국장과 행정일체를 담당하며 1938년까지 부상병들을 돌보셨습니다. 1940년 6월 24일, 전쟁 중에 뇌명원 신부님이 선종하시자 신부의 유언에 따라 조신부님은 요한의 작은 형제회 장상을 맡으시고 계속해서 전장의 최전선에서 부상병 구호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중조산(中條山) 전투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국군이 패전하자, 조 신부님과 10명의 수사님들이 포로로 잡혀 베이징(당시 북경)의 감옥에 100여 일 구금되셨습니다. 일본군의 모진 고문으로 불행하게 수사님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1940년 8월 15일, 성모승천기념일 당일에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베이징(북경)의 수도원으로 귀환하실 수 있었습니다. 점령당한 지역에서 업무처리를 주관하시면서 신학을 독학하며 부족한 학점을 보충하면서 사제서품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1944년 사제품을 받으신 뒤 계속해서 수도원 원장을 맡으셨으며,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흩어졌던 수사님들을 소집하여 수도원을 재정비하셨습니다.
1947년 공산당의 장정 기간 중에 봉사활동을 요청 받아 「천주교 구호대」를 조직하여 장가구와 남구(張家口, 南口) 일대에서 구호활동을 펴다, 1949년 공산당이 북평(현, 베이징)을 침범하기 전, 북평의 천단(天檀)광장 임시 비행장에서 청도로 탈출, 상해를 경유하여 홍콩으로 피신하셨습니다. 이후 홍콩으로 무사히 피신한 15명의 수사님들과 화남회원(華南會院)을 설립하고, 수도회업무를 다시 정비, 전교와 사회복지 업무를 속개하셨습니다. 1950년 6월, 홍콩정부가 수만의 유랑하는 난민들 중 8천여 명을 조경령(調景嶺)에 난민촌을 만들자 홍콩 교구장 헨리쿠스(Henricus Valtora) 주교의 요청으로 조 신부님과 수사님들은 그곳에 성모승천 성당과 가톨릭 학교를 세우시고 직접 운영하셨습니다.
1954년 1월, 홍콩의 성모승천 성당과 학교는 수사님들에게 위임을 하신 뒤, 수도원 재건을 위해 일부 수사님들과 대만으로 이동하시게 됩니다. 거기서 유치원 및 초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시면서 대북현(台北縣)에 성당과 수도원을 설립하셨습니다. 1963년부터 1975년까지 뇌명원 신부가 중국에 설립해 운영하던 학교들이 대만으로 이동하자, 이 기간에 학교교육에 투신하게 됩니다. 1986년 11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영예의 십자훈장을 수여 받으십니다. 1980년 수도회 총 책임자에서 물러나시어 책임자의 비서 역할을 자임하십니다. 그 후 2003년까지 교육기관과 본당 사제로 봉직하시면서 경영책임을 맡으셨고, 약 8년간 안국수도원[眞福院] 명의 수도원 총원에서 요양하시다 2011년 1월 26일 98세에 주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신부님은 총 7편의 책을 저술하셨는데, 신수강령은 1970년 중 후반에 집필하신 것으로 추정되며 책으로 출간된 된 시점은 198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조립산(曹立珊) 신부님은 1913년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록현(東?縣)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924년 베이징의 상의(上議)사범학교에서 수학하신 뒤, 1929년 하북성 안국현(安國縣)에서 뱅상 레브(Vincent Lebbe, 중국명 雷鳴遠) 신부님이 창립한 「요한(耀漢)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 1932년에 첫 서원을 하셨습니다. 선화성(宣化城) 천주교 신학원(神哲學院)에 입학, 철학과 신학을 수학하셨습니다. 1935년 12월 24일 종신 서원을 하시고,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으로, 뇌명원 신부가 야전구호부대를 조직하자 그 일원으로 참전하시어 최전선[太行山과 中條山]까지 가서 부상병들을 구호하는데 투신하셨습니다. 뇌명원 신부님이 단장을 맡으시고, 조신부님은 사무국장과 행정일체를 담당하며 1938년까지 부상병들을 돌보셨습니다. 1940년 6월 24일, 전쟁 중에 뇌명원 신부님이 선종하시자 신부의 유언에 따라 조신부님은 요한의 작은 형제회 장상을 맡으시고 계속해서 전장의 최전선에서 부상병 구호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중조산(中條山) 전투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국군이 패전하자, 조 신부님과 10명의 수사님들이 포로로 잡혀 베이징(당시 북경)의 감옥에 100여 일 구금되셨습니다. 일본군의 모진 고문으로 불행하게 수사님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1940년 8월 15일, 성모승천기념일 당일에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베이징(북경)의 수도원으로 귀환하실 수 있었습니다. 점령당한 지역에서 업무처리를 주관하시면서 신학을 독학하며 부족한 학점을 보충하면서 사제서품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1944년 사제품을 받으신 뒤 계속해서 수도원 원장을 맡으셨으며,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흩어졌던 수사님들을 소집하여 수도원을 재정비하셨습니다.
1947년 공산당의 장정 기간 중에 봉사활동을 요청 받아 「천주교 구호대」를 조직하여 장가구와 남구(張家口, 南口) 일대에서 구호활동을 펴다, 1949년 공산당이 북평(현, 베이징)을 침범하기 전, 북평의 천단(天檀)광장 임시 비행장에서 청도로 탈출, 상해를 경유하여 홍콩으로 피신하셨습니다. 이후 홍콩으로 무사히 피신한 15명의 수사님들과 화남회원(華南會院)을 설립하고, 수도회업무를 다시 정비, 전교와 사회복지 업무를 속개하셨습니다. 1950년 6월, 홍콩정부가 수만의 유랑하는 난민들 중 8천여 명을 조경령(調景嶺)에 난민촌을 만들자 홍콩 교구장 헨리쿠스(Henricus Valtora) 주교의 요청으로 조 신부님과 수사님들은 그곳에 성모승천 성당과 가톨릭 학교를 세우시고 직접 운영하셨습니다.
1954년 1월, 홍콩의 성모승천 성당과 학교는 수사님들에게 위임을 하신 뒤, 수도원 재건을 위해 일부 수사님들과 대만으로 이동하시게 됩니다. 거기서 유치원 및 초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시면서 대북현(台北縣)에 성당과 수도원을 설립하셨습니다. 1963년부터 1975년까지 뇌명원 신부가 중국에 설립해 운영하던 학교들이 대만으로 이동하자, 이 기간에 학교교육에 투신하게 됩니다. 1986년 11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영예의 십자훈장을 수여 받으십니다. 1980년 수도회 총 책임자에서 물러나시어 책임자의 비서 역할을 자임하십니다. 그 후 2003년까지 교육기관과 본당 사제로 봉직하시면서 경영책임을 맡으셨고, 약 8년간 안국수도원[眞福院] 명의 수도원 총원에서 요양하시다 2011년 1월 26일 98세에 주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신부님은 총 7편의 책을 저술하셨는데, 신수강령은 1970년 중 후반에 집필하신 것으로 추정되며 책으로 출간된 된 시점은 1982년경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