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조국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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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9/05/18
Pages/Weight/Size 160*230*17mm
ISBN 9791188765430
Categories 사회 정치 > 언론학/미디어론
Description
일제강점기에서 해방공간까지 신문기자 및 문필가로서 왕성한 취재 및 시사 논평을 투고하였던 오기영 선생의 생전 단행본과 기고문 등을 모아 엮은 『동전 오기영 전집』 중 제3권으로 1947년 5월부터 1948년 6월까지 잡지, 신문 등에 투고한 28편의 정치·사회평론을 모은 평론집이다. 『민족의 비원』 후속편이라 할 이 책이 포괄하는 시대상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좌절, 유엔 감독 하의 남북한 총선거 결정,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내한, 남북협상, 5·10선거 등으로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격변을 거듭하며 숨가쁘게 진행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1년 중에 우리 민족의 두상(頭上)에는 실로 심상(尋常)치 아니한 명암과 희비가 교차(交叉)하였다. 희망인 듯 실망에 빠지고 실망 끝에 다시 희망의 줄을 잡기도 하였”던 시기이다. 무엇보다 오기영으로서는 형님과 매부 죽음으로, 그리고 그를 포함한 가족들이 민족과 함께 고난을 거듭하며 일구어 온 통일독립국가의 꿈이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에 내몰리던 시대상황을 “자멸의 참화가 목전에” 닥친 상황으로 진단하면서, 때론 슬픔으로, 때론 분노와 두려움 속에 조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오기영이 자유주의자로서 중정(中正)의 태도로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는 입장이 주로 제시되었다. 권두에는 1946년 발행된 『자유조국을 위하여』 초판본 표지를 비롯, 『새한민보』, 『신천지』 등에 실린 그의 기사 사진이 8쪽의 화보로 실렸다.
Contents
화보-남북분단과 자유조국을 위하여
해제 _김태우
자서(自序)
새 자유주의의 이념―독재와 착취 없는 건국을 위하여
민족 위기의 배경―냉정 전쟁(冷靜戰爭)에 희생되는 조선 독립
독립 번영의 기초―도산(島山) 정신의 3대 요점
도산 선생 10주기 / 독립에의 신(新)출발 / 자주의 기초 / 평범의 이념 / 생산과 노동 / 시급한 기술교육 / 응분(應分)의 애국 / 인격 혁명의 생활화―흥사단 33주(周) 기념일에 / 부러운 승리의 날―미국 독립기념일에
재개 공위 전망(再開共委展望)
공위(共委)에 여(與)함 / 공위(共委)와 공존(共存) / 사회단체 정의―세계사전(世界辭典) 들출 것 없다 / 답신(答申)을 검토함 / 이러한 정부를 원한다
조선의 실태―웨더마이어 사절(使節)에 보낸 서한
가연(苛捐)과 민생 / 테러의 근멸(根滅) / 누구를 위한 유혈이냐
UN과 조선 독립―내조(來朝) 위원단에 주노라
단선(單選)의 실질(實質) / 남북협상의 의의
3·1정신의 재인식
일본의 야욕(野慾) / 일본의 재무장(再武裝)
Author
오기영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