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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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9/05/18
Pages/Weight/Size 160*230*17mm
ISBN 9791188765416
Categories 사회 정치 > 언론학/미디어론
Description
일제강점기에서 해방공간까지 신문기자 및 문필가로서 왕성한 취재 및 시사 논평을 투고하였던 오기영 선생의 생전 단행본과 기고문 등을 모아 엮은 『동전 오기영 전집』 중 제2권으로 1945년 12월부터 1947년 5월까지 잡지와 신문 등에 기고한 23편의 정치·사회평론을 모은 평론집이다. 이 글들은 해방의 감격도 잠시 “모두 정치가가 되어 버리고 마는 통에… 산업진을 지키는 이가 없었”던 현실 속에서, 오기영이 언론계에 복귀하는 대신 “황폐해진 생산 부문의 재건을 위하여 일졸오(一卒伍)”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몸담은 이래로 쓴 글들이다.

그는 “자주적 경제 건설과 생산, 인민의 민생 문제 등”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겪은 바를 토대로 현하 조선의 최대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문제라는 점을 피력한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해방의 당연한 귀결점으로 인식되었던 통일독립의 꿈이 급속히 좌절되”면서 “조국을 재건한다는 미증유의 호기가 다시금 민족자멸의 위기로” 변해가고 있었던 당대 현실을 타개해 보려는 심정을 피를 토하듯이 밝히고 있다. 권두에는 그의 글이 실린 『민성』, 『동광』, 『신천지』 등의 잡지 표지, 기사 등 16쪽의 화보가 실려 있다.
Contents
화보-미 군정기와 민족의 비원
해제 _김태우
투필(投筆)의 실패―자서(自序)에 대(代)하여
이성의 몰락―한 자유주의자의 항변
정치의 탄력성
언론과 정치
민요(民擾)와 민의(民意)―언론계에 보내는 충고
참괴(?愧)의 신 역사―해방 후 1년간의 정치계
시련과 자유―해방 1주년을 맞이하며 / 곡영우(哭迎又) 1년―민족의 지향을 찾자
도산(島山) 선생의 최후
오동진(吳東振) 선생을 추도함
좌우합작의 가능성―불합작(不合作) 구실의 축조적(逐條的) 검토 / 3당 합동(合同)의 생리(生理)
민족의 비원―하지 중장(中將)과 치스티아코프 중장을 통하여 미소 양 국민에 소(訴)함
속(續) 민족의 비원―경애하는 지도자와 인민에게 호소함
중앙인민위원회에―남북 양대 세력에게 주는 말 / 입법의원에 여(與)함―무엇이 가능하겠는가?
관료와 정치가
5원칙과 8원칙
신탁과 조선 현실 / 삼상 결정(三相決定)과 대응책 / 국제 정세와 공위(共委) 속개―우리의 운명을 냉정히 인식하자
미국의 대(對)조선 여론
민중
건국·정치·생산
생산하는 나라
예수와 조선―혁명 정신의 반동화를 계(戒)하여
추기(追記)
Author
오기영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