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