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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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8/10/15
Pages/Weight/Size 152*225*40mm
ISBN 9791187342120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북한 사학계는 광복 후 ‘반도고조선설’과 ‘한사군=한반도설’ 즉,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하는 고고학자들과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하는 문헌사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61년 북경대에서 통과된 북한 사학자 리지린의 박사학위 논문 [고조선 연구]가 소개되면서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이 북쪽 사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

일제식민사학자, 조선봉건사학자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학자들을 ‘대국주의’, ‘중화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민족의 주체적인 사관을 펼친 리지린의 논문은 지금도 여전히 일제 식민사학의 그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남쪽 사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Contents
해제 대륙 고조선사의 진실을 찾아낸 연구에 경탄 ___ 6
화보 고조선 유물 ___ 26
머리’말 ___ 41

제1장 고조선의 력사 지리
제1절 고대 문헌 자료상에서 본 고조선의 위치 ___ 60
제2절 고대 문헌상에서 본 고조선 령역의 변동 ___ 80
제3절 기원전 2세기 말(한4군의 설치 시기)까지의 료수의 위치(연, 진의 장성의
동단과 관련하여) ___ 123
제4절 고조선의 패수의 위치에 대하여 ___ 175
제5절 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___ 197

제2장 고조선 건국 전설 비판
제1절 단군 신화 비판 ___ 222
제2절 기자 조선 전설 비판 ___ 271

제3장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에 대한 고찰
제1절 예족과 맥족에 대하여 ___ 300
제2절 예, 맥과 고조선과의 관계 ___ 354
제3절 《삼국지》와 《후한서》의 《예전》과 《옥저전》에 기록된 《예》의 위치에
대하여 ___ 394
제4절 맥국의 사회 경제 구성 ___ 405

제4장 숙신에 대한 고찰
제1절 고대 숙신(肅愼)의 위치 ___ 420
제2절 고대 숙신(肅愼)과 고조선과의 관계 ___ 438

제5장 부여(夫餘)에 대한 고찰
제1절 부여는 어느 종족의 국가인가? ___ 444
제2절 부여와 고조선과의 관계 ___ 456
제3절 부여의 사회 경제 구성 ___ 472

제6장 진국(삼한)에 대한 고찰
제1절 삼한 동천설에 대한 비판 ___ 528
제2절 진국의 북변 ___ 537
제3절 삼한인은 어느 종족인가 ___ 553
제4절 진국의 사회 경제 구성 ___ 556

제7장 옥저에 대한 고찰
제1절 옥저에 관한 자료에 대하여 ___ 596
제2절 옥저의 위치에 대하여 ___ 605
제3절 옥저인은 어느 종족인가 ___ 619

제8장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본 고대 조선 문화의 분포
제1절 석기 유물의 분포 ___ 624
제2절 토기 유물의 분포 ___ 632
제3절 거석 문화의 분포 ___ 641
제4절 청동기 유물의 분포 ___ 648

제9장 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그 사회 경제 구성
제1절 고조선 사회의 생산력 ___ 664
제2절 고조선의 문화 ___ 686
제3절 고조선의 국가 형성 ___ 695
제4절 고조선의 사회 경제 구성 ___ 708

맺는말 ___ 737
도판 ___ 746
Author
리지린,이덕일
리지린은 1916년 평남 강동군에서 태어나 1935년 평양 광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41년까지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했으며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귀국 후 평양 광성중학교, 선천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해방 직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 법대 전신)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6년부터는 평양고등사범학교에서 근무했다. 한국전쟁 이후 과학원 력사연구소 고대사연구실에 근무하면서 1959년 〈 광개토대왕비의 발견 경위에 대하여《( 고력사과학》1959년 5월)〉를 발표했다. 1960년에는 〈 고조선국가형성에 관한 측면의 고찰(상·하:《력사과학》(1960년 2월, 4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고조선 연구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 학계는 광복 후 ‘반도고조선설’과 ‘한사군=한반도설’ 즉, ‘낙랑군=평양설’ 을 주장하는 고고학자들과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하는 문헌사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인 1958년 3월경부터 리지린은 북경대 대학원에 들어가 고사변학파의 고힐강(顧詰剛)을 지도교수로 고조선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61년 6월 말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후 같은 해 8∼9월 평양에서 열린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의 서변《(력사과학》 1964년 3월)〉,〈《삼국사기》를 통해 본 고조선의 위치《(력사과학》, 1966년 3월)〉,〈《삼국사기》와《 제왕운기》를 통해 본 고조선의 위치《(력사과학》, 1966년 5월)〉,〈고구려의 영주제《( 력사과학》, 1967년 5월)〉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1976년에는 강인숙과 공저로《고구려사연구(사회과학원 출판사)》를 발표했다. 이후의 행적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리지린은 1916년 평남 강동군에서 태어나 1935년 평양 광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41년까지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했으며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귀국 후 평양 광성중학교, 선천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해방 직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 법대 전신)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6년부터는 평양고등사범학교에서 근무했다. 한국전쟁 이후 과학원 력사연구소 고대사연구실에 근무하면서 1959년 〈 광개토대왕비의 발견 경위에 대하여《( 고력사과학》1959년 5월)〉를 발표했다. 1960년에는 〈 고조선국가형성에 관한 측면의 고찰(상·하:《력사과학》(1960년 2월, 4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고조선 연구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 학계는 광복 후 ‘반도고조선설’과 ‘한사군=한반도설’ 즉, ‘낙랑군=평양설’ 을 주장하는 고고학자들과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하는 문헌사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인 1958년 3월경부터 리지린은 북경대 대학원에 들어가 고사변학파의 고힐강(顧詰剛)을 지도교수로 고조선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61년 6월 말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후 같은 해 8∼9월 평양에서 열린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의 서변《(력사과학》 1964년 3월)〉,〈《삼국사기》를 통해 본 고조선의 위치《(력사과학》, 1966년 3월)〉,〈《삼국사기》와《 제왕운기》를 통해 본 고조선의 위치《(력사과학》, 1966년 5월)〉,〈고구려의 영주제《( 력사과학》, 1967년 5월)〉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1976년에는 강인숙과 공저로《고구려사연구(사회과학원 출판사)》를 발표했다. 이후의 행적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