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북스에서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과 글들을 엮은 『안중근의 말』을 출간했다. 이 책은 한문으로 쓰인 원문을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한글로 옮기고 엮은 것으로, 안중근 의사에 관한 책과 자료들 중 잘못 전해진 내용을 수정, 보완해 실었다. 이 책으로 불의에 맞선 그의 뜨거운 마음과 마주하며, 그의 글들을 온전히 읽고,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Contents
01장__나의 어린 시절
중근이라는 이름을 얻다 / 수양산에서 청계동으로 / 죽음을 면한 첫 번째 고비
02장__갑오년의 소용돌이
동학당의 횡포에 맞서다 / 동학당의 진지 속으로 / 빼앗긴 자, 빼앗은 자 / 즐기지만 부끄러운 일
03장__천주교에 입교하다
형제들에게 할말이 있소이다 / 거룩한 주재자를 위하여 / 다만 그 몸을 기댈 뿐 / 주관하는 이가 없다면 /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04장__의협 청년
무엇을 두렵다 하는가 / 출표식장의 소란 / 그곳에서 만난 동지
05장__힘 있다고 모두 옳은가
이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 / 그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을 벌하겠소 / 증인으로 법정에 서다 / 어찌 사사로이 법을 쓰겠는가
06장__혼란스러운 날들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우니 / 시대는 어디로 가는가 / 아버지의 치욕 / 집에서 다시 경성으로
07장__독립하는 그날까지
을사년의 울분 / 역사 뒤에 숨은 자들 / 신부에게서 길을 찾다
08장__사람이 희망이다
어찌 이대로 죽기를 바라는가 / 국채보상회 / 나라를 잃은 처지 /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도울까 / 여러 곳을 돌며 뜻을 모으다
09장__북간도의 독립군 의병장
북간도에 모인 의병들 / 일본군을 사로잡아 풀어 주다 / 아무리 뜻을 한데 모은들
10장__모진 세상을 만나
동지를 모아 몸을 추스르다 / 풍찬노숙과 기아 / 산속의 세례 / 연해주로 돌아오다
11장__피로 결의한 대한 독립
일진회 잔당에게 사로잡히다 / 피로 결의한 대한 독립 / 이토 히로부미의 행방
12장__하얼빈에 울린 총성 하얼빈으로 가는 길 / 불안한 밤 /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 그를 저격한 이유 / 고마운 사람들 / 갑자기 달라진 재판 / 재판관 뜻대로 하라 / 1910년 3월
13장__한국인 안중근
어질고 약한 죄 / 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 / 성체성사를 받다
14장__대한 동포에게 고함
인심결합론 / 나, 한국인 안응칠 / 일본 법정에 서서 / 대한 동포에게 고함 / 마지막 유언
15장__동양평화론
세계 역사를 돌아보면 / 동양의 평화를 말한다 /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으로 / 어찌 혼자 이겼다 하는가 / 일본의 만행을 규탄한다
Author
안중근,안중근의사숭모회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안응칠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6세 때 가족이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으며, 학문보다 사냥에 뜻이 있어 명사수로 성장했다. 16세 때인 1896년 김아려와 결혼해 이후 2남1녀를 두었고, 이듬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7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이때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평양에서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이후 연해주로 가서 의병대열에 참가해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투쟁에 나셨다. 1909년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는데, 이때 이들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붉은 피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을 새겼다. 그해 10월 26일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옥중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며, 이 중 『동양평화론』은 형이 집행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안응칠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6세 때 가족이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으며, 학문보다 사냥에 뜻이 있어 명사수로 성장했다. 16세 때인 1896년 김아려와 결혼해 이후 2남1녀를 두었고, 이듬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7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이때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평양에서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이후 연해주로 가서 의병대열에 참가해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투쟁에 나셨다. 1909년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는데, 이때 이들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붉은 피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을 새겼다. 그해 10월 26일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옥중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며, 이 중 『동양평화론』은 형이 집행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