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은 프로문학의 퇴조와 모더니즘의 피로감으로 물들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의 대표적 시인이다. 이 시기의 오장환이 대면한 것은, 근대에의 열망에 추동된 진보의 낙원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성의 이념으로 무장한 계몽의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의 시집 [성벽]과 [헌사]에는 봉건적 세계에 대한 부정과 근대에 대한 환멸의 자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성벽’으로 상징되는 전통을 부정하고 고향을 떠난 후, 항구를 유랑하다 귀향하는 일련의 서사 구조는 이러한 시적 정서를 일구어내는 밑그림으로 작용한다. 유랑과 귀환의 서사를 통해서 오장환은 도회적 정조에 깊이 침윤된 모던 보이들의 후예이기를 거부하면서, 오직 미적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집 [성벽]과 [헌사]는 1930년대 후반의 미학적 인식이 도달한 임계점을 보여주는 주요한 지표가 된다. 우리가 이 시집들을 정밀하게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텍스트의 물질성은 한 시인의 시 세계와 마주치는 순간의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시 혹은 시집은, 그 순간부터 크고 작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형의 운명 속에서 텍스트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은 텍스트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시집의 정확한 판본을 복원하고 이를 보존하는 것은, 시인을 향한 후학들의 예의이자 애정의 표현이며, 앞으로 그의 시를 읽게 될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될 것이다.
본 정본화 연구에서는 시인이 발표한 원고와 초판본 시집 그리고 시인 사후에 출간된 다양한 판본들을 각각 비교, 대조하는 과정을 거쳐서 [성벽]과 [헌사]의 정본을 구축하였다. [원본비평연구 성벽/헌사]가 오장환의 시에 대한 독자들의 정확한 이해를 돕고, 그의 시를 향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다만, 이 시집에서 다양한 판본의 비교 과정이 생략되어 독자들이 텍스트의 변천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정본화 과정에서 드러난 텍스트의 변형과 복원의 원칙 및 중요한 복원 사항은 이 책의 말미에 덧붙이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