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전동에서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하여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 국문판
한(韓)·영(英) 양국어로 된 신문으로,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洞: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 성명은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梁起鐸)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朴殷植)이 활약하였고, 그 밖에 신채호(申采浩)·최익(崔益)·장달선(張達善)·황희성(黃犧性) 등이 필진으로, 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 등이 경영에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대한제국과 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 국적을 가진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데일리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이다. 한국식 이름은 배설(裵說)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16살 때부터 일본 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여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직에 지원하여 190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러일전쟁 관련 취재를 위한 입국이었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3]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제소까지 걸어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데 금고 기간이 끝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909년 5월 1일 한국에서 향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 요소 중 하나인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장지연이 비문을 썼지만 늘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이 비문마저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도 신문사는 유지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다음 날부터 유명세를 악용당해 '대한' 제호만 떼어낸 친일 신문 [매일신보]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바뀌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입구 쪽에 베델의 묘가 있으며, 1968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대한제국과 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 국적을 가진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데일리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이다. 한국식 이름은 배설(裵說)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16살 때부터 일본 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여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직에 지원하여 190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러일전쟁 관련 취재를 위한 입국이었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3]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제소까지 걸어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데 금고 기간이 끝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909년 5월 1일 한국에서 향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 요소 중 하나인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장지연이 비문을 썼지만 늘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이 비문마저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도 신문사는 유지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다음 날부터 유명세를 악용당해 '대한' 제호만 떼어낸 친일 신문 [매일신보]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바뀌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입구 쪽에 베델의 묘가 있으며, 1968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