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 일제는 전국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유림계를 회유하여 친일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일본의 의도하에 1907년 3월 신기선(申箕善), 이용직(李容稙) 등이 중심이 되어 대동학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신기선을 선출하였다. 대동학회는 유도로서 체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을 삼아 신구(新舊)의 사상을 합일시킨다는 목적을 내세우며 13명의 발기인 명의로 설립되었다.
대동학회가 추진한 사업은 경전(經典)주1을 강명(講明)주2하여 도덕을 존숭(尊崇)주3하는 일, 신지식이 발달한 서적을 비치하여 강습(講習)을 자(資)주4하는 일, 수신 처세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일, 신금강연소(神衿講硏所) 수 처를 설치하는 일, 학교를 설치하여 동지(同志) 자제(子弟)를 교육하는 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관한 실업을 흥기(興起)주5하는 일, 강의록과 회보와 잡지를 발간하는 일, 도서관을 지어 공중의 열람을 제공하는 일, 기타 본회의 유익한 사업을 점차 확장하는 일 등이었다.
이러한 설립 목적에 따라 대동학회는 일요일마다 명망 있는 인사들을 초빙하여 순회 강연을 실시하였다. 또한, 학회 내에 편집부를 설치하고 1908년 2월부터 『대동학회월보(大東學會月報)』를 발간하여 유교, 법학, 경제, 실업 등 다양한 주제의 기사를 실었으며, 1909년 9월 통권 2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08년 3월 대동학회 회관 안에 대동전문학교(大東專門學校)를 설립하고 신입생 235명을 선발하여 개교하였다. 1909년 봄, 1년 과정의 속성과는 50명의 학생을 졸업시킨 후 폐과되었고 본과만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졸업생은 관리, 교육계, 변호사, 사무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동학회는 신기선에 대한 비난 여론과 학회 내 갈등 등으로 인해 활동이 저조해지기 시작하였다. 1909년 2월 회장 신기선이 사망하면서 학회가 폐지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1909년 10월 공자교(孔子敎)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