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0월 19일 천주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발간한 순한글판 주간신문이다. 발행인 겸 주필은 프랑스인 신부 안세화(安世華, Florian Demange)였다.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한 것은 외국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통감부(統監府)의 언론탄압을 피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창간사를 통하여 『경향신문』이라는 제호는, 서울백성뿐만 아니라 시골백성에게도 배포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의도 아래 명명된 것이라 하고, 공정한 보도와 지식의 보급을 그 신문의 사명이라고 밝혔다. 초기에는 타블로이드판 4면과 부록으로 국판 크기의 8면 보감(寶鑑)을 발행하였으며, 이듬해 10월 18일 제53호부터는 판형을 바꾸어 오늘날의 신문 크기와 비슷하게 발행되었다.
제1면에 주로 일일특보(日日特報)라 하여 국내의 주요 기사 및 시사문제에 관한 논설과 국내외 소식, 문예작품, 계몽적인 기획물들이 실렸고, 부록인 보감은 시사성을 띤 신문기사와는 다른 성격의 교리적인 논설, 한국천주교교회사, 중요한 법률해설 등으로 꾸며졌다.
기사나 논설은 독자들로부터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았으며, 논설은 당시 대표적인 일간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전재되기까지 하였다.
Author
안세화
Demange, Florian(1875~1938). 초대 대구교구장(大邱敎區長). 주교.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1875년 프랑스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1870년 독불전쟁(獨佛戰爭)으로 로렌지방이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3년 파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다시 이수하였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을 전공한 다음 1898년 졸업과 동시 사제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신학교에서 6년간 봉직하면서 내국인 사제 양성에 정진 하던 차, 1906년 10월 19일에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개화기의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불과 4년 만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폐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법률문답’이란 고정란을 통해 민중과 공직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유익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찬사와 신뢰 때문에 편집 책임자인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주 컸었다.
Demange, Florian(1875~1938). 초대 대구교구장(大邱敎區長). 주교.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1875년 프랑스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1870년 독불전쟁(獨佛戰爭)으로 로렌지방이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3년 파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다시 이수하였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을 전공한 다음 1898년 졸업과 동시 사제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신학교에서 6년간 봉직하면서 내국인 사제 양성에 정진 하던 차, 1906년 10월 19일에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개화기의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불과 4년 만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폐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법률문답’이란 고정란을 통해 민중과 공직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유익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찬사와 신뢰 때문에 편집 책임자인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주 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