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둔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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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1/06/21
Pages/Weight/Size 153*225*30mm
ISBN 9791167420336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파리에서 둔황까지』는 폴 펠리오가 중앙아시아에서 둔황의 문서를 발견하기까지의 경위와 발굴한 자료들의 중요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구성했다. 폴 펠리오는 유럽의 다른 동양학자들과는 달리 특기할 만한 대중적 강의가 없다. 서평이나 주고받은 서신조차도 모두 전문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위와 대상 역시 ‘동양’ 세계를 모두 아우르고 있어, 글 제목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그의 연구 작업도 번역되어 소개된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러한 점이 펠리오 씨의 학문적 삶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를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는 ‘실크로드’라고 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둔황이고, 둔황하면 법현, 현장, 혜초 같은 구법승을 떠올리며, 혜초라고 하면 바로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본 폴 펠리오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런데도 폴 펠리오에 관한 책들은 우리나라에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20세기 서방 탐험가들의 여행기록이 상당수 소개되었고, 나아가 직접 실크로드를 탐방하며 쓴 여행기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도 20세기 초의 탐사기록과 그들이 남긴 흑백 사진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다가 우리는 펠리오 자신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혁혁하고 흥미진진한 모험담에 이끌리다 보면 정작 그 중요한 의미를 간과하기에 십상이다. 표의문자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한자는 정말 불가사의한 글자였겠지만,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별다른 것이 없다. 저들이 중요하다고 하여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도 ‘오오타니 컬렉션’이란 둔황과 중앙아시아의 유물이 소장되어있다. 작은 ‘편린’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와의 관계성을 찾아가야 한다. 『파리에서 둔황까지』가 그러한 질문의 출발선에 서 있기를 바란다.
Contents
역자의 말 09

오뜨아지에서 보낸 3년 23
1909년 12월 10일 소르본 대학 대강당에서 행한 펠리오의 콘퍼런스

감숙성에서 찾은 중세 도서관 69
중앙아시아 탐사를 담당한 극동프랑스학교(EFEO) 교수 폴 펠리오

동투르키스탄 조사(1906~1909)에 관한 폴 펠리오 씨의 보고서 139

중앙아시아에 관한 설명 155
극동프랑스학교 중국어 교수 폴 펠리오

오뜨아지 175

학술원 임원인 폴 펠리오의 삶과 작업에 관한 설명 249
루이 레누(Louis Renou, 학술원 임원)

부록 295

역자 후기 304

찾아보기 306
Author
폴 펠리오,박세욱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프랑스 동양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에두아르 샤반느(Eouard Chavannes)의 소개로 저명한 동양학자 실뱅 레비(Sylvain Lei)의 제자가 된다. 어학 능력이 뛰어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등 13개 언어를 구사했다.

극동프랑스학교(Eole Francise d’Extreme-Orient)의 유급연구생이 되어 1900년 하노이로 갔고, 곧바로 중국 도서를 확보하기 위해 북경으로 여행했다. 마침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여 프랑스 대표부를 방어하는 군사작전에 참여했는데, 그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 겨우 23세의 나이로 극동프랑스학교 중국 문학 교수가 되었다. 1906년 6월 중앙아시아 탐사대를 이끌고 카슈갈에 도착하여, 툼슈크, 쿠차, 투루판, 둔황 막고굴을 탐사했다. 둔황 장경동에서 일일이 확인하며 선별한 6000여 필사본을 얻어냈다. 이러한 펠리오의 행운과 탁월한 혜안은 프랑스를 유럽 중국학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20세기 동서양의 중국학계를 둔황학으로 향하게 했다. 1909년 프랑스로 돌아온 1911년부터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ee de France)에서 중앙아시아, 역사, 문화, 언어의 교수로 활동했고 1920년부터는 유럽 중국학의 산실인 『통보(T’oung Pao)』를 앙리 꼬르디에(Henri Cordier)와 함께 편집했으며, 이듬해에는 금석문 및 문학 아카데미(Acade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의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부터는 파리 엔느리(Ennery) 박물관장을 역임했다.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프랑스 동양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에두아르 샤반느(Eouard Chavannes)의 소개로 저명한 동양학자 실뱅 레비(Sylvain Lei)의 제자가 된다. 어학 능력이 뛰어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등 13개 언어를 구사했다.

극동프랑스학교(Eole Francise d’Extreme-Orient)의 유급연구생이 되어 1900년 하노이로 갔고, 곧바로 중국 도서를 확보하기 위해 북경으로 여행했다. 마침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여 프랑스 대표부를 방어하는 군사작전에 참여했는데, 그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 겨우 23세의 나이로 극동프랑스학교 중국 문학 교수가 되었다. 1906년 6월 중앙아시아 탐사대를 이끌고 카슈갈에 도착하여, 툼슈크, 쿠차, 투루판, 둔황 막고굴을 탐사했다. 둔황 장경동에서 일일이 확인하며 선별한 6000여 필사본을 얻어냈다. 이러한 펠리오의 행운과 탁월한 혜안은 프랑스를 유럽 중국학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20세기 동서양의 중국학계를 둔황학으로 향하게 했다. 1909년 프랑스로 돌아온 1911년부터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ee de France)에서 중앙아시아, 역사, 문화, 언어의 교수로 활동했고 1920년부터는 유럽 중국학의 산실인 『통보(T’oung Pao)』를 앙리 꼬르디에(Henri Cordier)와 함께 편집했으며, 이듬해에는 금석문 및 문학 아카데미(Acade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의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부터는 파리 엔느리(Ennery) 박물관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