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영화 <한산><명량><노량> 원작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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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08/25
Pages/Weight/Size 128*188*30mm
ISBN 9791164455911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영화 〈한산〉 〈명량〉 〈노량〉의 원작 모티브!
국보 76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난중일기』 완역본
영웅 이순신이 죽음으로 지켜낸 조선 수호 연대기


1,700만 관객으로 국내 영화 관객 수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 〈명량〉의 후속작 〈한산〉의 흥행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원작 모티브인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다. 진한 감동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린 충무공 이순신은 가공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다. 우리 민족은 5천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을 겪었지만, 성웅 이순신과 같은 슬기로운 조상들이 있었기에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난중일기』는 명장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일기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1592년 5월 1일부터 그가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이다. 일기의 친필 초고는 현재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도 붙어 있지 않았으나, 1795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5부터 권8에 걸쳐 이 일기를 수록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난중일기』 속 정유년 9월 15일(양력 10월 25일)의 일기 내용 중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글귀는 마음을 비우는 삶의 자세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부하를 각별히 아끼는 그의 리더십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을미년(1595년) 9월 14일 이순신은은 늘 곁에 있던 부하 수사 선거이와 작별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북쪽에 갔을 때 즐거움과 고생을 함께했고
남쪽에 왔을 때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구나.
오늘 밤 이 달빛 아래에서 한 잔의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져야 함을 아쉬워하겠구나.
_본문 속에서, 310p

이순신의 부하를 먼저 생각하는 리더십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고 곧 7년의 기나긴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대승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또한 이 책에는 일러스트로 보는 명량해전도, 모친과 함께 한 이순신의 효성, 거북선, 판옥선의 삽화가 담겨 있어 전략가이자 영웅으로서의 이순신의 삶을 잘 엿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해 가는 충무공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와 리더십이 담긴 『난중일기』를 더클래식 동양고전으로 만나 보자.

閑山島月明夜上戍褸 한산도월명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 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하처일성강적갱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_충무공 이순신(1545~1598)
Contents
임진년 1592년

1월 : 전쟁의 기운을 느끼다 / 2월 : 전투 준비를 하다 / 3월 : 거북선의 대포를 쏘다 / 4월 :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 5월 : 옥포에서 왜적과 대립하다 / 6월 : 당항포의 왜적을 물리치다 / 8월: 부산 앞바다에 이르다

계사년 1593년

2월 : 왜적 소탕을 위해 웅천으로 가다 / 3월 : 왜적과의 대립이 이어지다 / 5월 : 명나라 관리를 맞이하다 / 6월 : 진을 한산도로 옮기다 / 7월 : 진주성이 함락되다 / 8월 : 꿈속에서 유성룡과 만나다 / 9월 : 조총을 만들다

갑오년 1594년

1월 : 잠시 어머니를 뵙다 / 2월 : 호남의 왜적을 물리치다 / 3월 : 아픈 몸으로 수군을 지휘하다 / 4월 : 왜선 100여 척이 절영도로 가다 / 5월 : 왜적을 생포하다 / 6월 : 믿었던 사람을 잃다 / 7월 : 명나라 장수와 만나다 / 8월 : 권율과 이야기를 나누다 / 9월 : 적도에 진을 치다 / 10월 : 왜적을 위협하다 / 11월 : 왜적 수색을 명하다

을미년 1595년

1월 : 나라와 어머니를 걱정하다 / 2월 : 군량을 나누어 주다 / 3월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계략을 간파하다 / 4월 : 왜선 50여 척이 진해로 가다 / 5월 : 왜적의 목을 베도록 하다 / 6월 : 어머니의 병환이 완쾌되다 / 7월 : 거제의 왜적이 물러가다 / 8월 : 임금의 뜻을 확인하다 / 9월 : 아끼던 사람과 이별하다 / 10월 : 왜적의 정세를 살피다 / 11월 : 달아나려는 왜적의 목을 치도록 하다 / 12월 : 체찰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병신년 1596년

1월 : 왜적의 움직임을 살피다 / 2월 : 둔전에서 벼를 받다 / 3월 : 몸이 불편해 신음하다 / 4월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해 듣다 / 5월 : 왜적이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다 / 6월 : 계속해서 활을 쏘다 / 7월 : 도적이 일어나다 / 8월 : 아들들과 시간을 보내다 / 윤8월 : 백성들의 참혹한 삶을 보다 / 9월 : 전라도를 순시하다 / 10월 : 어머니를 위해 수연을 열다

정유년 1597년

4월 : 어머니와 영원히 작별하다 / 5월 : 비통한 심정을 참아 내다 / 6월 : 장수를 잃다 / 7월 : 왜적에게 대패하다 / 8월 : 3도 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다 / 9월 :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다 / 10월 : 아들 면을 영원히 잃다 / 11월 : 명나라 장수에게 축하를 받다 / 12월 : 임금의 명에 감격하다

무술년 1598년

1월 : 진을 치고 왜적을 치다 / 9월 : 명나라와 협공하다 / 10월 : 뇌물을 받고 명의 군사를 철수시키다 / 11월 : 충무공이 전사하다

참고 문헌
이순신 연보
옮긴이의 말 | 진정한 리더,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Author
이순신,김문정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