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도산이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한학을 배웠으며,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구문물과 기독교 정신을 습득했다. 20살 때인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이듬해에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민권운동을 주도했으며, 1900년대 초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며 교포들의 계몽활동에도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해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으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37년에는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듬해인 1938년 3월 간경화증으로 생을 마감하며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시신은 서울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에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도산이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한학을 배웠으며,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구문물과 기독교 정신을 습득했다. 20살 때인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이듬해에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민권운동을 주도했으며, 1900년대 초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며 교포들의 계몽활동에도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해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으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37년에는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듬해인 1938년 3월 간경화증으로 생을 마감하며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시신은 서울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에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