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았는가? 이 책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자기 역사와 땅으로부터 유리된 인간은 난민일 뿐이며, 난민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난민촌이라는 것이다. 난민촌에서 주고받는 말은 의미가 아니라 넋두리, 쌍육, 헛소리, 원망, 비방 등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이러한 현상이 팽배해 있음을 지적하며, 최악과 차악을 따지는 싸움은 결과적으로 짙은 감정을 남기는 분열을 초래할 뿐임을 보인다.
저자는 한국인의 난민화를 부추기는 외적인 요인으로 외세를, 내적인 요인으로 내부적 통합성의 빈약함을 꼽는다. 그리고 건국, 산업화, 민주화라는 대한민국의 과제를 완수하는 데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세 지도자의 정치 노선과 행태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그는 한국의 난민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자적 생존을 위한 주체적인 '개인의 확립'과 좌파적 의미의 민주주의론의 허구성을 극복한 '민주주의 제도 수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일보』의 학술 담당 기자로 이슈가 된 여러 논쟁에 참여한 바 있는 저자의 생각들을 볼 수 있다.
Contents
제1장. 난민의 의식 구조와 행태
1. 난민의 과거, 현재, 미래
2. 난민의 공간 의식
3. 난민의 행동 양식
제2장. 외세, 우리 역사를 흔드는 손
1. 이승만 대 신채호
2. 일본 제국주의 - 미군정 - 대한민국
3. 한국인에게 사대주의는 불치병인가
4. 차악(次惡)을 놓고 벌이는 내분
제3장. 한국인의 난민성
1. 한국인은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가
2. 한국인은 20세기 세계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3. 보잘것 없는 나라의 세력 다툼
4. 대한민국은 '건국'에 실패하고 있지는 않은가
5. 건국과 희생
제4장. 지도자, 우리의 지도자
1. 이승만과 김대중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평가
2. 박정희의 길과 김대중의 길
3.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4. 이승만 - 박정희 - 김대중과 아데나워
제5장. 한국 사회에서 개인
1. 한국 사회에 개인은 있는가
2. 그리스 시대의 '시민'
3. 로마 시대의 '평민'
4. 근대가 발명한 '개인'
5. 한국에서 '개인'의 출현
제6장. 한국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한국의 강정인 교수
2. 미국이ㅡ 로버트 달 교수
3. 〈아레오파기티카〉를 옮긴 박상익 교수
4. 독백에서 대화로
Author
이한우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매료되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의 문제]를 썼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첫 작품으로 《헤겔 이후의 역사철학》을 냈다. 그 후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번역병으로 근무할 때에는 네 권을 번역해 계급마다 한 권씩 번역한 셈이 됐다. 번역은 나의 운명을 바꿔놓기까지 했다. 1990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중앙일보]의 《뉴스위크》였다. 그때 정식기자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고 ‘번역하는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삶은 점점 그쪽으로 몰고갔다. 1991년 《월간중앙》에 김용옥의 《대화》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돼 [문화일보] 학술 담당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번역하는 기자’에서 ‘기사 쓰는 기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문화일보] 기자 생활 만 3년째 되던 1994년 12월에 [조선일보]의 제의를 받았다. [조선일보] 학술 출판 담당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명암을 볼 수 있을 만큼 봤다. 2001년부터 1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연수 생활을 하면서 촌티도 많이 벗었다. [조선일보] 국제부에서 일했고, 지금은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매료되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의 문제]를 썼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첫 작품으로 《헤겔 이후의 역사철학》을 냈다. 그 후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번역병으로 근무할 때에는 네 권을 번역해 계급마다 한 권씩 번역한 셈이 됐다. 번역은 나의 운명을 바꿔놓기까지 했다. 1990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중앙일보]의 《뉴스위크》였다. 그때 정식기자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고 ‘번역하는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삶은 점점 그쪽으로 몰고갔다. 1991년 《월간중앙》에 김용옥의 《대화》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돼 [문화일보] 학술 담당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번역하는 기자’에서 ‘기사 쓰는 기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문화일보] 기자 생활 만 3년째 되던 1994년 12월에 [조선일보]의 제의를 받았다. [조선일보] 학술 출판 담당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명암을 볼 수 있을 만큼 봤다. 2001년부터 1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연수 생활을 하면서 촌티도 많이 벗었다. [조선일보] 국제부에서 일했고, 지금은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