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인 권력 자본 이론을 바탕으로 자본, 생산성, 공동체, 지식, 금융 등의 주제를 포괄하고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회의했던 베블런은 주식회사의 확산과 자본 시장으로 대표되는 당대 미국 자본주의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자본의 본성을 해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베블런은 자본이란 경제적 생산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에 기초한 존재임을 갈피했으며, 나아가 화폐적 존재로서의 자본이 금융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방식을 배태함에 따라 이윤의 발생 및 축적 구조가 변화하는 모습을 분석함으로써 금융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Contents
들어가는 말|홍기빈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1 : 자본재의 생산성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2 : 투자, 무형 자산, 금융의 거물
현대의 영리적 자본
해제 ― 권력으로서의 자본 : ‘금융화’ 시대의 베블런|홍기빈
1. 들어가며 ― 정치경제학자 베블런
2. 베블런과 그의 미국 자본주의
3. 요소 생산성 개념의 거부와 사회적 지식의 중심성
4. 권력으로서의 자본
(1) 산업 생산에 대한 ‘깽판 놓기’
(2) 무형 자산의 자본화
(3) 자본의 ‘매물화’와 금융 자본
(4) 금융적 거물에 의한 자본가들의 수탈
5. 신자유주의 시대의 ‘금융화’와 베블런
주
더 읽어야 할 자료들
옮긴이에 대하여
Author
소스타인 베블런,홍기빈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