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이 바젤 대학교 의대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은 것은 20세 생일을 두 달 앞둔 1895년 4월 18일이었다. 이어 그는 스위스 대학생들의 우애 단체인 조핑기아 클럽 바젤 지회의 회원이 되었다. 이 클럽의 특징은 매주 모임에서 회원들이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 강연을 하고 토론을 벌인다는 점이었다. 융은 1900년 7월에 의학 공부를 끝낼 때까지 조핑기아 클럽에서 강연을 네 차례 했다. 그 원고를 묶은 것이 이 책이다.
융이 조핑기아 클럽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5년에 융 탄생 100년을 맞아 취리히의 심리학 클럽에서 열린 기념 전시회에서 이 원고가 처음 공개되었다. 글은 21세에서 23세 사이에 쓴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렵다. 칼 융의 다른 책들을 접한 독자라면, 청년기에 품었던 사상들이 풍성하게 발달해 가는 과정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칼 융의 동료로 마찬가지로 조핑기아 클럽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구스타프 슈타이너(Gustav Steiner)의 회고에 따르면, 융은 조핑기아 클럽의 경험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학창 시절이 우정을 나누고 지적 교류를 하는 즐거운 시기였던 한편, 융이 하고자 하는 말을 동료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진정으로 외로움을 느끼던 시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활동 중인 조핑기아 클럽은 1820년경에 설립되었으며, 칼 융이 활동할 당시의 모토는 ‘조국과 우정과 문학을 위하여’였다.
Contents
〈이 책에 대하여〉 - 칼 융의 걸작 『레드 북』의 뿌리
1장 정밀과학의 경계구역들(1896년 11월)
2장 심리학에 관한 몇 가지 생각(1897년 5월)
3장 이론적 조사의 본질과 가치에 관하여(1898년 여름)
4장 알브레히트 리츨의 기독교 해석에 대하여(1899년 1월)
Author
칼 구스타프 융,정명진
1875년 7월 26일 스위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젤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의 원장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서 심리학 연구를 시작했다. 자극어에 대한 단어 연상 실험을 연구하면서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을 입증하고 이를 ‘콤플렉스’라 명명했다. 1907년 이후 프로이트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그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성적 에너지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 에너지라 하여 갈등을 빚다 결국 결별했다.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내적으로도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이때 독자적으로 무의식 세계를 연구해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고 믿고 집단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또한 각 개체의 통합을 도모하게 하는 자기원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집단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신화학, 연금술, 문화인류학, 종교학 등을 연구했다. 1961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75년 7월 26일 스위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젤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의 원장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서 심리학 연구를 시작했다. 자극어에 대한 단어 연상 실험을 연구하면서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을 입증하고 이를 ‘콤플렉스’라 명명했다. 1907년 이후 프로이트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그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성적 에너지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 에너지라 하여 갈등을 빚다 결국 결별했다.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내적으로도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이때 독자적으로 무의식 세계를 연구해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고 믿고 집단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또한 각 개체의 통합을 도모하게 하는 자기원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집단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신화학, 연금술, 문화인류학, 종교학 등을 연구했다. 1961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