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전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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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7/25
Pages/Weight/Size 135*197*20mm
ISBN 9791157956999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
외롭고 쓸쓸하고 토속적인 시어들의 향연

천억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한다면서 평생을 기다린 자야!


백석의 사랑에는 시가 있고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평생을 기다린 시간뿐이었다. 백석이 사랑했던 기생 김영한과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 더한 애절함이 백석을 좋아하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또한 ‘자야’라는 애칭과 함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탄생하여 평생 만나지 못한 그들의 이별 끝자락에 ‘길상사’가 세워진다.

백석은 인간의 삶에 직접 와 닿는 시어들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시어들을 보면 우리 전통의 생활과 풍습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드러나는 시들이 많다. 여러 지방의 고어와 토착어, 평안도 방언을 시어로 가져와 썼고 이 책에서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고어와 토착어, 평안도 방언을 그대로 살려 각주와 해설을 달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 놓았다. 본문에서 비슷한 시기의 발표작임에도 단어의 표기를 다르게 한 경우가 있는데 맞춤법을 통일하던 당시의 혼란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돼 있으며 존재하는 백석 시집 중 가장 많은 시를 수록했다. 1부는 그의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사슴』, 2부는 해방 이전의 시, 3부는 해방 이후 북에서 창작한 시이며 3부의 경우 남북 분단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고착화가 이루어진 이후 발표한 시라 그런지 표기법 변화 및 한자의 미사용 등이 눈에 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라고 말하는 시인.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라고 말하는 시인.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같다는 시인 백석. 그의 시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있지 않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을 가지고 사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시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Contents
서문

1. 사슴

1 얼룩소 새끼의 영각
가즈랑집 | 여우난골족 | 고방 | 모닥불 | 고야 | 오리 망아지 토끼

2 돌덜구의 물
초동일 | 하답 | 주막 | 적경 | 미명계 | 성외 | 추일산조 | 광원 | 흰밤

3 노루
청시 | 산비 | 쓸쓸한 길 | 자류 | 머루밤 | 여승 | 수라 | 비 | 노루

4 국수당 넘어
절간의 소 이야기 | 통영 | 오금덩이라는 곳 | 시기의 바다 | 정주성 | 창의문외 | 정문촌 | 여우난골 | 삼방

2. 그 외 해방 이전의 시

산지 | 나와 지렝이 | 통영 ─남행시초 | 오리 | 연자간 | 황일 | 탕약 | 이두국주가도 | 창원도 ─남행시초 1 | 통영 ─남행시초 2 | 고성가도 ─남행시초 3 | 삼천포 ─남행시초 4 | 함주시초 | ─ 북관 | ─ 노루 | ─ 고사 | ─ 선우사 | ─ 산곡 | 바다 | 추야일경 | 산중음 | ─ 산숙 | ─ 향악 | ─ 야반 | ─ 백화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석양 | 고향 | 절망 | 외갓집 | 개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물닭의 소리 | ─ 삼호 | ─ 물계리 | ─ 대산동 | ─ 남향 | ─ 야우소회 | ─ 꼴두기 | 가무래기의 낙 | 멧새소리 | 박각시 오는 저녁 |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 동뇨부 | 안동 | 함남도안 | 구장로 ─서행시초 1 | 북신 ─서행시초 2 | 팔원 ─서행시초 3 | 월림장 ─서행시초 4 | 목구 | 수박씨, 호박씨 | 북방에서 ─정현웅에게 | 허준 | 『호박꽃 초롱』 서시 | 귀농 | 국수 | 흰 바람벽이 있어 | 촌에서 온 아이 | 조당에서 | 두보나 이백같이 | 당나귀

3. 해방 이후의 시

산 | 적막강산 |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칠월백중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감자 | 계월향 사당 | 등고지 | 제3인공위성 | 이른 봄 | 공무려인숙 | 갓나물 | 공동식당 | 축복 | 하늘 아래 첫 종축 기지에서 | 돈사의 불 | 눈 | 전별 | 탑이 서는 거리 | 손’벽을 침은 | 돌아온 사람 | 석탄이 하는 말 | 강철 장수 | 사회주의 바다 | 조국의 바다여

백석 연보
Author
백석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