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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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0/03/21
Pages/Weight/Size 152*223*30mm
ISBN 9791155820032
Categories 에세이
Description
이명환의 세 번째 수필집에 보내는 편지

명환의 세 번째 수필집 추천사를 부탁받고는 한동안 난감했다. 우리는 대학 선후배나 문단 선후배랄 것도 없이 더러 만나 밥 한 끼 먹고 담소하는 사이로, 그의 타고난 푸근함이 편해서 임의롭게 만나는 친구다. 늘 한 고향 사람 같아서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는 처지에 무슨 추천사를 쓰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소에 부담 없이 읽히는 그의 글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번 신작을 꼼꼼히 읽고 편안히 내 느낌을 써 보자는 마음에 수락했다. 그동안 그가 발표한 글들을 대강 읽기는 하였으나 이번 신작뿐만 아니라, 전에 낸 두 권의 수필집도 다시 보고 싶어서 모두 보내 달라 했더니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2020년 2월 부군인 성찬경 시인의 7주기 전에 책을 내고자 한다 하니 은근한 재촉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19년도 저물어 가는 11월 초의 일이었다. 명환은 2020년이 오기 전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경황없이 지낸 그간의 삶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첫 수필집 『지상의 나그네』와 두 번째 책 『나그네의 축제』를 읽고 나니, 아주 오래전 [이대학보사]에서 공모하여 입선했던 중편소설 두 편이 생각나 그것도 보내 달라 청했다. 2019년 12월 31일에 빠른 등기로 배달된 이대 재학 시절의 소설을 읽느라 섣달그믐 밤을 꼬박 새웠다. 1961년의 가작 「젖할매」와 1962년의 당선작 「디오니소스의 후예」에서 만났던 소설가 이명환이 이제 수필가의 이름으로 세 번째 수필집을 상재하겠다는데 그 노정路程이 궁금해서다.

1962년 본심을 안수길 선생님과 당시 학장이셨던 이헌구 선생님, 영문과 소설 담당이신 나영균 교수가 맡으셨다. 원고지 400장이 넘는, 중편으로는 다소 무거운 「디오니소스의 후예」와 몇 편의 다른 소설의 예비 심사를 내가 맡았을 때, 영문과 3학년 학생의 소설로는 얼마간 사변적이기는 했지만, 독특한 주제와 탄탄한 문장력에 끌려서 학생 공모 작품이 아닌 소설로 읽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저 친구로 만나며 바라본 그의 삶은 그대로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출간된 그의 수필집 제호가 ‘지상의 나그네’ ‘나그네의 축제’이듯 그가 엮어 가던 천로역정의 삶은 그대로가 소설이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창세 47:9)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列朝와 다름없이 나그네와 우거寓居한 자라,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1역대 29:15)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本鄕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브 11:13)

성경에서는 이 땅에 태어난 인간 모두를 나그네라 지칭한다. 가톨릭 세례명이 ‘사도 요한나’인 이명환이 이승의 나그네로서 찾아 나선 본향의 길이 그대로 천로역정이었다. 이번 수필집도 『겨울 나그네』로 할까 생각 중이라 했다.

이명환이 송운松韻 성찬경 시인을 만난 것은 충남 예산여고에서 담임 김광회 선생(시인)의 특별한 소개였다. “장차 한국 시단을 이끌 대단한 시인이 예산농고 영어 선생님이다. 그는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서울문리대 영문과 출신이다.” 이렇게 해서 아홉 살 연상의 스승뻘 송운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명환을 알아본 것도 예사롭지 않았거니와, 그가 이대에 다니는 동안 선머슴 같은 이 여학생을 눈여겨보고, 이미 자리가 잡힌 기성 시인이 끊임없는 편지로 당신의 뜻을 전하고 이해시켜 아내로 맞기까지, 송운의 정성은 연애가 아니라 영혼의 길동무를 알아본 영혼의 노래였을 것이다.

졸업 후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도 송운의 편지는 이어졌고, 드디어 결혼을 결심하고 송운의 아내가 되기로 했을 때 본인은 스스로를, 천성이 엽렵지 못하고 우둔한 내가 어쩌다 보니 번족한 대종손 집 맏며느리가 되었다며 한탄스러워 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옹색한 ‘응암동 수재민 주택’에 둥지를 튼 결혼 생활에서 십 년 동안에 줄줄이 다섯 남매를 낳아 길렀다. 사실 그 무렵 우리 또래 가운데 아이를 다섯이나 두는 예는 드물었다.

그의 삶은 단 한 뼘의 여유도 없이 시집살이와 아이들 치다꺼리로 영일 없는 나날이었지만, 그는 어떤 조건에서도 세월을 무심히 흘려버리지 않고, 소중한 것을 찾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고단한 요한나의 일상은 그 자체가 그의 영혼에서 우러나는 고백의 글감이 되었다. 여섯 살 때 엄마를 떠나보낸 그의 삶에서 이승의 불가해는 깊었지만, 고통과 고독, 신산辛酸에서 불평이나 원망 대신 자신에게 부여된 환경에 숨어 있는 은총과 기쁨을 찾아냈다. 음악, 독서, 미술에 대한 소양과, 그의 나이 중반이 넘어 달려든 스키는 웬만한 여자는 꿈도 꿀 수 없던 레저를 즐기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스키장에서 만난 밤하늘의 별과 신비스런 설원에서의 에피소드를 몇 편의 글로 남겼다.송운이 떠난 지 6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가 쓴 시에 얹어 자전적 글을 쓰면서 젊은 날을 회상하고 성찰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 많다고 흠 잡히던 어머니 이명환에게서 부모를 닮아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은 4남 1녀 자녀들의 오늘은 눈부시다. 장남은 시인이며 뮤지션이고 차남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고명딸은 작가겸 작곡가, 3남은 가톨릭 사제로 부모와 가문의 신앙의 터 닦음이 되었다. 신심과 시심으로 맑은 삶을 길어올린 아버지와, 과감하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롓길을 홀로 두 번씩이나 다녀온 어머니의 자연회귀自然回歸에서 우러난 온갖 예지叡智를 물려받아, 주님께 산 제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요한나 이명환이 천로역정에서 거둔 열매들이다.송운의 시에는 영혼의 미세한 실핏줄이 시인의 그리움을 타고 알아볼 사람에게만 드러나는 애절함이 있고 그 애절함을, 명환은 송운을 떠나보내고 산문을 곁들여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올린다. 몇 편을 제외하고 대부분, 송운의 시를 렌즈 삼아 바라본 또 하나의 삶에서 추출한 글들로 이번 수필집을 엮었다.

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솔한 영혼의 고백이면서 때로는 사막의 교부에서나 만날 수 있는 묵상의 속삭임으로 남겨진 이야기들이다. 이명환의 삶 자체가 이러한 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고등학교 학생인 이 사람을 알아보고, 영혼의 교감을 이룬 송운의 영감적 심오함을 더하여 얻게 된 예술혼은 아니었을까. 얼른 보아 숫되기 이를 바 없는 그의 성정 어디에서 그렇듯 유려한 문장이 술술 이어지는지 신기했다. 남다른 어휘 구사력으로 사전을 찾게 만드는 그의 문장력은 이미 58년 전 대학생 때 보여 준 타고난 실력이었다. 그때 이미 기성 소설가 행렬에 들 만큼 원숙했던 소설이 두 편으로 마감된 것은 아쉽지만, 뒤늦게 수필로 틈틈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은 우리를 묵상 잠언箴言의 경지로 안내한다. 난감하던 숙제를 마무리하며 새삼 친구 이명환을 더 깊이 배운 계기에 감사드린다.

경자년 정초에 정연희 쓰다
Author
이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