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과 관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지혜!
『군주론』과 쌍벽을 이루는 궁정 처세술의 바이블을 다시 만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쌍벽을 이루는 르네상스 최고의 정치 교양서 『궁정론』이 리커버 버전으로 재출간을 애타게 기다리던 독자들을 찾아왔다. 『군주론』이 군주의 통치 기술에 관한 책이라면, 『궁정론』은 이상적인 궁정 신하의 덕목과 처세에 관해 다룬 책이다. 16세기 초 서유럽 세계를 호령하던 카를 5세는 언제나 세 권의 책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틈날 때마다 그것들을 읽곤 했다는데, 『성경』, 『군주론』과 함께 그가 소중히 간직했던 책이 바로 『궁정론』이었다.
이 책을 쓴 발데사르 카스틸리오네는 거의 전 생애를 만토바, 우르비노, 밀라노, 로마 등지의 이탈리아 궁정에서 일했던 르네상스의 외교관이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궁정론』을 집필하는 데 평생을 바친 카스틸리오네는, 그 스스로가 궁정인의 미덕을 고루 갖춘 전형적인 궁정 신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528년, 『궁정론』의 등장은 유럽 세계의 '문명화 과정'에 커다란 지적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유럽의 엘리트 교양 계층이나 정치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초판 발간 이후 150종이 넘는 다양한 판본과 번역본을 통해 세계 전역에 퍼져나간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과 관습을 담은 최초의 개론서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교육적으로, 문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Author
발데사르 카스틸리오네,신승미
1478년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저한 인문학 교육을 받았으며 세련된 예술 감상법을 몸에 익혔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궁정으로 손꼽혔던 우르비노 궁정에서 그는 1504년부터 1516년까지 12년 동안 궁정 신하로 일하며 통치자 두 명을 섬겼다. 처음 모신 군주는 구이도발도 공작이었다. 구이도발도 공작은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하여 중요한 임무를 많이 맡겼다.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에서 지내며 여가시간에 문학작품을 집필하거나 다양한 지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1508년에 구이도발도 공작이 사망하자 작위를 이어받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계속 섬기며 1513년에 로마 주재 대사로 파견됐다. 그러나 1515년에 프란체스코 마리아 공작이 우르비노에서 추방당하자 카스틸리오네도 대사직에서 파면되어 1516년부터 4년 동안 만토바 근처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서 조용히 생활했다. 이어 그는 1519년에 만토바 대사 자격으로 로마로 복귀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1524년부터 로마 교황청에서 재직했다. 이후 1529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로마 교황 사절단으로 일했다.
1478년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저한 인문학 교육을 받았으며 세련된 예술 감상법을 몸에 익혔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궁정으로 손꼽혔던 우르비노 궁정에서 그는 1504년부터 1516년까지 12년 동안 궁정 신하로 일하며 통치자 두 명을 섬겼다. 처음 모신 군주는 구이도발도 공작이었다. 구이도발도 공작은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하여 중요한 임무를 많이 맡겼다.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에서 지내며 여가시간에 문학작품을 집필하거나 다양한 지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1508년에 구이도발도 공작이 사망하자 작위를 이어받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계속 섬기며 1513년에 로마 주재 대사로 파견됐다. 그러나 1515년에 프란체스코 마리아 공작이 우르비노에서 추방당하자 카스틸리오네도 대사직에서 파면되어 1516년부터 4년 동안 만토바 근처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서 조용히 생활했다. 이어 그는 1519년에 만토바 대사 자격으로 로마로 복귀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1524년부터 로마 교황청에서 재직했다. 이후 1529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로마 교황 사절단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