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3일, JTBC [뉴스룸] 2부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말로 문을 열었다.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 테러 규탄을 위해 파리 시내로 쏟아져 나온 프랑스 시민들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남긴 이 말 “크세주(Que sais-ju)”에 주목한 것이다. 서로 어깨를 걸고 파리 시내를 행진하는 무슬림, 가톨릭, 유대인들의 모습을 담은 스크린을 배경으로 앵커 손석희는 질문을 던졌다. “서로 다른 종교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공존하며 또 연대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낮은산 청소년 인문교양 [사람은 왜] 시리즈의 두 번째 책, 『사람은 왜 알고 싶어 할까』의 저자 채운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겪었는데도 서로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든지,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해석이 엇갈렸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맞고 상대는 틀린 게 분명한데, 상대편에서 자기가 맞고 나는 틀렸다고 하면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내가 안다(고 믿는) 것은 무엇일까? 사과 한 알을 둘러싸고도 우리의 상태, 우리가 놓인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감각하고 다른 식으로 앎을 구성하는 예를 열거하며 저자는 “이쯤 되면, 우리가 아는 건 하나도 없다”고 토로한다.
이는 우리의 앎이 외부로부터, 객관적인 상태 그대로 입력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취향, 기질, 목적 등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걸러진 채, 말하자면 ‘가공 처리’되어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익과 편견, 욕망 등에 따라 ‘제멋대로’ 인식한다는 얘기다. 그러할진대 객관적인 사실, 오직 하나뿐인 진실이라는 게 존재할까? “앎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동시에 하나의 세계에 갇힌다”는 저자의 통찰은 세계를 경악케 한 테러 사건으로 드러난 앎의 두 얼굴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앎이 우리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둘 때 그것은 “나만 옳고 남들은 다 틀렸다”는 독단과 폭력이 되지만, 앎이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때 그것은 연대와 공존을 이룬다.
Contents
머리말
01 앎과 나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장자의 꿈과 몽테뉴의 놀이
내가 보는 ‘그것’은 정말 ‘그것’일까: 세상은 나의 앎을 배반한다
진실 ‘그리고’ 거짓: 진실의 거짓과 거짓의 진실
안다는 것(知)과 모른다는 것(無知):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혁명적 가르침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법: 왜 우리는 알고 싶어 하는가
02 앎과 세계 앎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내 눈에 속지 않는 법
전장(戰場)에서 피어오르는 앎: 게으름뱅이의 비극
움직이고 접속하라!: 앎,관계들의 우주
셜록, 기억의 궁전을 거닐다: 무의식과 앎
세계를 만드는 천 개의 눈: 세계‘들’의 탄생
03 앎과 행동 앎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안다: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회색빛 지식, 늘 푸른 소나무: 그대의 앎을 연마하라!
너에게 가는 길: 공감과 나눔으로서의 앎
근육맨이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하여: 그대의 앎을 실험하라
04 앎과 배움 배움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욕망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앎의 이상한 기쁨
호학(好學)과 안빈낙도(安貧樂道): 배움은 자유다
앎의 포도밭을 거닐다: 앎을 음미하는 즐거움
흐르는 물처럼, 뜨거운 불처럼: 배움의 달인들을 소개합니다
진정한 굿 다운로더가 되는 법: 앎을 전염시켜라!